권오직은 북한 인민위원회외무성 부수상, 북한 주중공 대사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23년 청년운동에 투신한 이후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유학하였다. 공산주의 활동으로 인해 두 번의 수형 생활(1930년 6년형, 1939년 8년형)을 치른 후 광복을 맞아 출감하였다. 광복 직후 재건조선공산당 및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활약하다가 북한으로 피신해 인민위원회외무성 부수상을, 이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주중공 대사 등을 역임하였다. 1954년 박헌영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후 평안북도 삭주의 농장으로 추방되었다가 행방불명되었다.
조선노동총연맹 및 고려공산청년회 제2대 책임비서를 지낸 형 권오설(權五卨)의 영향을 받아 1923년부터 청년운동에 참여하였다.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의 사업으로 모스크바에 유학생을 파견할 때 김조이(金祚伊) · 김희원(金喜元) · 고명자(高明子) 등 16명과 함께 제1차로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여운형(呂運亨) 등의 주선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й университет трудящихся Востока)을 마치고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와해된 고려공산청년회 및 조선공산당의 재건임무를 부여받고 1929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 귀국하던 도중 한빈(韓斌) 등을 만나 코민테른 동양부의 지령을 전달하였다. 같은 해 10월 이영조(李永祚) · 김응기(金應基)와 함께 서울로 잠입하여 11월 16일에는 국내에서 활약하고 있던 김단야(金丹冶) · 김정하(金鼎夏) · 채규항(蔡奎恒) · 박민영(朴珉英) 등과 함께 연희전문학교 부근 숲 속에서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를 개최하여 선전부의 책임을 맡았다.
1930년 1월에는 속속 입국하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출신자들과 연락하여 장규정(張奎晶) · 주청송(朱靑松) · 김연배(金連培)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경성구조직위원회를 결성하는 등 공산당재건운동에 주력하였다. 그 해 3·1운동 11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광주학생운동으로 고조된 반일감정을 격발시키기 위하여 ‘3·1운동 11주년을 기하여 전조선노력대중에게 격함:만국무산자와 세계피압박민족은 단결하라’는 유인물을 제작, 유포하려다가 2월 27일 붙잡혀 6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출옥한 뒤 김삼룡(金三龍) · 이관술(李觀述) 등이 주도한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하다가 1939년 또다시 일제에 붙잡혀 8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출감하였다.
광복 직후 결성된 장안파공산당에 대항하여 박헌영(朴憲永)을 중심으로 결성된 재건조선공산당의 정치국원으로 활동하였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발표한 조선인민공화국의 후보위원에도 올랐으며 당시 조선공산당의 기관지인 『해방일보』의 주필 및 사장 등을 맡는 등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였다. 좌익세력의 집결체로서 1946년 2월 발족한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중앙위원으로 활약하다가 이른바 조선정판사위조지폐사건(朝鮮精版社僞造紙幣事件)으로 체포령이 내리자 북한으로 피신하여 인민위원회 외무성 부수상을 지냈다.
1948년 9월 북한에서 이른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을 역임하다가 1952년 주중공 대사로 부임하여 1953년까지 중공에 머물렀으나 소환되어 그 해 8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를 통해 후보위원에서 제명 · 출당되었다. 1년 뒤에 열린 박헌영의 간첩죄에 대한 재판에 이강국(李康國) · 조일명(趙一明) 등과 함께 증인으로 출두하여 박헌영이 미국의 간첩이었다고 증언하였으나, 평안북도 삭주의 농장으로 추방되었다가 곧 행방불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