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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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인물
해방 이후 조선부녀총동맹 총무부위원, 근로인민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고사찰(高四察), 김정주(金貞柱), 김정조(金貞祚), 시베리스카야, 오하라 아키코(大原明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904년(고종 41) 3월 15일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제주(濟州)
출생지
충청남도 부여군
관련 사건
후계조선공산당사건| 조선공산당재조직사건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고명자는 해방 이후 조선부녀총동맹 총무부위원, 근로인민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이다. 고사찰(高四察), 김정주(金貞柱), 김정조(金貞祚), 시베리스카야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1904년에 태어나 1918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에 대구 신명여학교를 졸업하였다. 고려공산청년회의 추천으로 모스크바로 유학하여 공산대학을 졸업한 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서울로 잠입했다가 체포되었다. 일본의 회유로 출감한 이후 오하라 아키코[大原明子]로 개명하고 친일잡지의 기자로 황민화정책에 협력하였다. 해방 이후 다시 좌익 여성운동에 참여하였다.

목차
정의
해방 이후 조선부녀총동맹 총무부위원, 근로인민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개설

고명자(高明子)는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및 해방 후 좌익 부녀운동에 참여한 여성 사회주의자이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고사찰(高四察), 김정주(金貞柱), 김정조(金貞祚), 시베리스카야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1904년 충청남도 부여군 석정면(石城面) 석정리(石城里) 523번지에서 출생하였으며(1926년 경성지방법원 검사정의 「사상요시찰인연명부」에는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고의환(高宜煥)이다.

생애

1918년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로 가서 1925년 3월에 대구 신명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한 해에 조선총독부 조산부양성소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사회주의운동에 뛰어들었다. 해방 뒤에도 좌익운동을 하였으며, 1950년 2월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6 · 25전쟁 발발후 생사여부를 알 수 없다.

활동사항

1925년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였다. 고려공산청년회가 유망한 청년 21명을 선발하여 소련으로 유학시킬 때, 여자로서 김명시(金命時), 김조이(金祚伊)와 함께 선발되어 11월에 모스크바로 유학,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 입학하였다. 1929년 5월에 공산대학을 졸업하였고 10월경에 일제의 탄압으로 무너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블라디보스톡과 함흥을 경유, 서울로 잠입했다.

1929년 9월부터 경성에서 조선박람회가 개최 중이여서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 가운데, 청진을 통해 들어온 김단야(金丹冶)와 마포구 도화동 85번지에 방을 빌려 동거하였다. 이곳 도화동 집에서 조선공산당 조직위원을 선정하고 여러 차례 회의를 가졌다. 일제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는 가운데 김단야는 피신했으나 고명자는 일경의 추적을 피하지 못하고 1930년 4월 강경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23명은 예심을 거쳐 1931년 10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최고 10년에서 미결구류 240일까지를 언도받았다. 일제는 고명자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형을 언도했으나 그녀에게 회유책을 펼쳐 곧바로 출감할 수 있었다. 그 이후 김명시, 김형선, 박헌영 등이 체포되며 공산당 재건 조직이 와해되었다. 고명자는 1939년에 창간된 친일잡지 『동양지광(東洋之光)』의 기자로 활동하며 친일 논조의 글을 발표하였고, 국민총동원 운동에 참여하는 등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협력하였다. 창씨명은 오하라 아키코[大原明子]이다.

해방 후 다시 좌익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1945년 11월에 개최된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대회와 12월의 조선부녀총동맹(朝鮮婦女總同盟) 결성대회에 서울대표로 참가하였다. 12월에 조선부녀총동맹 총무부위원과 서울지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독립동맹환영준비위원회에도 참석하였다. 1946년 2월에는 좌익계열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서울지부 선전부원이 되었고, 10월에는 사회노동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47년 5월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을 창당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4월에는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 근로인민당 대표로 참석하고 회의가 끝난 후 남행하였다. 1950년 2월에 남조선노동당특수부조직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이후 행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일제하사회운동사자료집』 2(김봉우 편, 한울, 1991)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1990)
『조선일보(朝鮮日報)』(1931.5.25)
『동아일보(東亞日報)』(1931.2.1; 1950.2.7)
『매일신보(每日申報)』(1931.10.29)
「현대여류사상가들(3)-붉은 연애의 주인공들」(『삼천리(三千里)』 17호, 1931)
『한국사회주의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창작과 비평사, 1996)
『한국공산주의운동사』 5(김준엽·김창순, 청계연구소, 1986)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고명자의 생애와 활동」(이성우, 『인문학연구』 84, 충남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1)
집필자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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