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당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중국에서 상해여자청년동맹 임시위원, 임시의정원 의원, 재건 한국애국부인회 조직부 주임 등으로 활동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연충효(延忠孝)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908년(순종 2) 7월 15일
사망 연도
1981년 1월 1일
본관
곡산(谷山)
출생지
중국 길림성 용정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연미당은 일제강점기 상해여자청년동맹 임시위원, 임시의정원 의원, 재건 한국애국부인회 조직부 주임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연충효이다. 1908년(순종 2)에 태어나 1981년에 사망했다. 12세 때에 가족과 함께 상해로 이주하였다. 1930년 상해여자청년동맹에 참여하였으며 항일연합전선 구축 운동을 주도하였다. 1936년부터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을 하며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대원으로 위문활동을 하였다.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했을 때 충칭방송에서 반일의식을 고취하고 여성 동포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는 선무 방송을 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중국에서 상해여자청년동맹 임시위원, 임시의정원 의원, 재건 한국애국부인회 조직부 주임 등으로 활동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개설

연미당(延薇堂)은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상해여자청년동맹(上海女子靑年同盟), 한국애국부인회(韓國愛國婦人會) 등을 중심으로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곡산(谷山)이며, 본명은 연충효(延忠孝)이다. 1908년 7월 15일 북간도 용정(龍井)에서 아버지 연병환(延秉煥)과 어머니 김정숙(金貞淑)의 1남 1녀 중에 맏딸로 출생하였다. 1938년 임시정부가 창사〔長沙〕에 피신했을 때부터 아명인 ‘연미당’ 이름을 사용하여 본명보다 ‘연미당’으로 알려졌다.

생애

12세 때인 1920년 초, 가족과 함께 상하이〔上海〕로 이주해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졸업하였다. 진강해관(鎭江海關)으로 전근하는 아버지를 따라 진강으로 이사하여 진강여자중학교를 다녔다. 192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상하이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정착하였다. 1927년 3월 20일 엄항섭과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폭탄투척 의거가 일어나자 상하이를 탈출하여 여러 곳을 전전한 끝에 1940년 9월 충칭〔重慶〕에 안착하였다.

광복이 되자 이듬해인 1946년 7월, 광복군 제2지대와 함께 미군함을 타고 한국으로 귀국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남편 엄항섭이 납북되자,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생활하였다. 말년에 중풍을 앓으며 고생하다가 1981년 1월 1일, 7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1930년 8월 16일, 상하이의 한국여자구락부가 상해여자청년동맹(上海女子靑年同盟)으로 재편되었을 때 참여하였다. 1931년 7월에 출범한 상해한인각단체연합회(上海韓人各團體聯合會)에 상해여자청년동맹 단체 대표로서 참여하여 독립운동계의 공동 항일연합전선 구축 운동을 주도하였다. 각 신문사에 배일전문을 보내고 중국 신문기자들을 초대해 한인들의 입장을 설명했으며 동연합회 명의의 의연금을 모금하는 일을 맡았다.

1930년대 초 임시정부가 조직한 특무조직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도 남편과 함께 참여하여 단장 김구(金九)를 적극 지원했으며 1932년 1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침공하자 중국군 19로군 부상병사에게 위문품을 보내는 위문활동을 하였다. 1932년에 상해여자청년동맹 임시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매년 8·29 국치기념일에 ‘국치기념(國恥紀念)’ 전단을 만들어 각 방면으로 배포하며 항일민족의식 앙양에 노력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거가 일어나자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자싱〔嘉興〕으로 피신했으며 위중한 상태에 있던 이동녕을 극진히 간호하였다. 1936년부터 연미당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어 의정활동을 하였고 재건 한국독립당이 새로 출범했을 때도 여성 당원으로 활약하였다. 1938년 10월에 결성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의 대원이 되어 중국의 선전공작대와 함께 선전 홍보 활동과 연극, 무용공연 등 위문활동을 하였다.

1943년 2월 23일, 각 정파의 여성들 50여 명이 모여 한국애국부인회(韓國愛國婦人會)를 재건했을 때, 조직부 주임으로 복무하며 충칭방송〔重慶放送〕에서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방송과 국내외 여성 동포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는 선무 방송을 하였다. 한편 중국전선에 끌려온 일본군 소속의 한적(韓籍) 사병들에게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활동 상황을 한국말로 알리며 일본군 진영에서 탈출하도록 유도하였으며 국제동맹군과 한국 동포들에게 중국에서의 일본군 만행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충칭 투차오〔土橋〕에 소재한 일본군포로수용소도 방문하여 한인 포로를 위문했으며 한국가요를 불러 그들의 향수와 애국심을 자극하는 공연을 펼치며 그들을 광복군으로 들어오도록 권유하는 초모공작(招募工作)도 적극 전개하였다.

한편 1943년 5월 10일, 충칭 한인사회에 종전 후 한국을 신탁 통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6개 대표 정당 및 단체들이 모여 재중국 자유한국인대회를 개최하였을 때, 한국애국부인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어떤 외세의 압박과 간섭도 반대할 것을 결의하고 “한국은 마땅히 독립국이 되어야 하고, 한민족은 마땅히 자유민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자유한국인대회 선언문」을 발표했으며 한국 민족의 완전 독립과 국제사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촉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33·34·35(국사편찬위원회 편, 2013)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대한민국국회도서관 편, 1976)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 자료 20(국사편찬위원회 편, 1968)
『조선사상운동조사자료(朝鮮思想運動調査資料)』 2(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 1933)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재상해일본총영사관경찰부 제2과(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 第二課), 1932)
『애국지사 연병환·연병호 전기』 (애국지사 연병환·연병호선생선양사업회, 2013)
『연미당의 애국춘추(愛國千秋)』(엄기선, 애국지사연병환·연병호선생선양사업회, 2013)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박영준 자서전』(한국독립유공자협회, 2005)
『지산외유일지(志山外遊日誌)』 (정원택 저. 홍순옥 편, 탐구당, 1983)
『사랑과 열정을 조국에: 일파 엄항섭선생·미당 연충효여사 부부 독립운동사』(대전애국지사숭모회)
「연미당의 생애와 독립운동」(이명화, 『역사와 담론』 73, 호서사학회, 2015)
「연병환의 생애와 민족운동」(박걸순, 『역사와 담론』 73, 호서사학회, 2015)
집필자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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