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7월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발생하자 한국 내에서는 한국인이 중국인을 폭행하여 죽거나 다치게 하는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이에 중국 내의 중국인들이 한국인에 대하여 적대감정을 가지게 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 문제가 중국에 있는 한국인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 여기고,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같은 해 7월 상해에 있는 민족진영계열의 흥사단(興士團)·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소년척후대(少年斥候隊)·소년동맹(少年同盟)·조선인교회 등의 대표 30여 명과 함께 조직하였다.
상무위원으로 흥사단장 안창호(安昌浩), 애국부인회장 오의순(吳義橓), 병인의용대원 이수봉(李秀峰), 소년척후대장 박창세(朴昌世), 기독교회 목사 송병조(宋秉祚)를 선임하고, 적극적인 배일운동을 전개하여 중국측을 무마하기로 하였으며, 필요한 자금은 상해에 있는 조선인들로부터 모금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9월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을 후원하고 일제를 타도하자는 취지를 내세우고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회장 박창세, 서기 서이균(徐利均), 회계 최혜순(崔惠淳)이었으며, 재상해한인대회를 소집하고 중국국민에게 보내는 해명서 1만여 장을 인쇄, 살포하였다.
1932년 중심인물인 안창호가 붙잡히고, 중국과 일본이 정전협정을 체결한 뒤 차차 소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