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원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여자애국단 초대 총단장, 흥사단원 등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885년(고종 22)에 태어나 1982년에 사망했다. 1905년 동생 강영승의 노동이민에 어머니 황마리아와 함께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가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미국 각지의 부인회를 통합하여 대한여자애국단을 결성하여 임시정부 지원, 독립신문 후원, 적십자 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흥사단에 입단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1942년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평안남도 평양성 안에서 아버지 강익보(康翊普)와 어머니 황마리아 사이에 2남 1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김성권(金聲權)과 결혼한 후 남편 성을 따라서 미주에서는 김혜원으로 통했으며, 영어 이름은 사라 김(Sarah Kim)이다. 어머니 황마리아는 맏딸 강혜원을 비롯해 3자녀를 동반하고 1905년 4월 하와이로 가는 이민선을 타고 인천을 출발하였다. 당시 17살이었던 동생 강영승의 노동이민에 가족이 동반하는 식으로 이민하였다.
5월 13일 하와이 가피올라니(Kapiolani) 농장에 배치된 강혜원은 바느질을 업으로 하며 하와이 마노아벨리(Manoa Valley) 여학교를 다녔다. 북미 중가주 롬폭(Lompoc)에 거주하는 김성권과 약혼하고 1913년 10월에 북미 캘리포니아(California)로 이주해 12월 9일 혼인, 다뉴바(Dinuba)에 정착하였다. 결혼 후 김성권과 사이에 3형제를 두었으며 막내아들은 전 하버드 음악대학 교수를 지낸 작곡가 김얼이다.
1919년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대한인국민회의 광복운동을 후원할 목적으로 다뉴바에서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복무하였다. 이후 5월 18일, 각 지방에 분립된 각 지역의 부인회를 합동하고 운동 역량을 한 곳에 집중하고자 한인부인회와 신한부인회가 합동을 결의하였을 때 주역이 되었다. 그리고 8월 2일, 다뉴바신한부인회 · 로스앤젤레스부인친애회 · 새크라멘토(Sacramento)한인부인회 · 샌프란시스코한국부인회 · 윌로우쓰(Willows)지방부인회 등과 통합을 이루어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을 결성하였다.
1920년 3월 13일 대한여자애국단 초대 총단장 겸 총부(總府)위원에 취임하여 1924년까지 복무하면서 임시정부 지원, 독립신문 후원, 구미위원부 선전비, 간도동포 기근구제금, 광주학생운동 후원금, 충무공유적보존회 후원, 중국 군사 위로금, 중국 난민 구제, 일본상품 배척, 적십자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강혜원은 1922년에 흥사단에 입단하여 제155번 단원이 되었으며 남편 김성권과 함께 흥사단에서 적극 활동하였다. 1939년 12월 27일, 제8대 대한여자애국단 총부단장에 다시 선출되어 1942년 1월까지 대한여자애국단을 지도하였다. 중일전쟁 때 송미령에게 중국군 솜옷 지원 의연금을 보내고 광복군 후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에 송금했으며 미국 전시공채를 매입하는 등 적극적인 전시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5월에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으로 흡수 통합하자, 남편 김성권과 함께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를 결성하여 진보적 노선 편에서 활동하였다. 1944년 대한여자애국단 참석 대표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담하여 임시정부 지원 모금과 재정지원 확보 활동을 하였다.
1982년 5월 31일 상오 10시 96세를 일기로 로스앤젤레스에서 타계하였으며 유해는 로스앤젤레스 로즈데일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