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 종가 유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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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종가 유물 중 유성룡 유물 - 관자
유성룡 종가 유물 중 유성룡 유물 - 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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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조선시대의 문신 유성룡(1542∼1607)의 유물과 고문서.
정의
조선시대의 문신 유성룡(1542∼1607)의 유물과 고문서.
개설

196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투구·갑옷·가죽신·상아홀·갓끈·관자·유서통·동국지도사본·문서 등이 있다. 경상북도 안동군 풍천면 영모각에 소장되어 있다.

내용

유성룡 종가 유물(柳成龍 宗家 遺物)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의 종손가에 전해오는 유물들로 첫째, 유성룡 선생이 직접 쓰던 것, 둘째, 선생의 어머니에 관한 곤문기, 그리고 선생에게 조정에서 내린 여러 문서들 등 세 가지로 구분된다.

(1) 유성룡유물

① 갑주:1구(具). 투구는 철제로서 높이 24㎝, 둘레 63.5㎝, 지름 20.5㎝이며, 형태는 네 조각의 철편을 붙인 것으로 위는 좁고 아래로 퍼진 모양을 하고 있다. 정개(頂蓋)에 보주장식을 하고 그 밑에 삭모를 달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앞쪽에는 반월형의 해가리개가 남아 있으나 뒤쪽의 목가리개는 흔적이 없다. 갑옷은 가죽조각을 연결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많은 손상을 입어 현재는 부분별로 남아 있다. 이 조각들은 부분에 따라 차이가 있어 10.7×3.5㎝, 7×2.8㎝, 4.8×1.8㎝의 세 종류가 남아 있다.

② 가죽신:1켤레. 길이 33㎝, 너비 7.5㎝로 신창은 다섯 겹을 합쳐서 만들고, 운두는 6.5㎝의 가죽을 돌려 만든 신이다. 태사혜인 것 같으나 코둘림이 원만하고 둥글어 약간 둔탁한 느낌을 준다.

③ 상아홀:1개. 4품 이상의 관료가 조복(朝服)·제복(祭服)·공복(公服)을 입을 때 휴대하는 것으로 길이 24㎝, 윗너비 6㎝, 아랫너비 9㎝, 두께 0.5㎝이다.

④ 갓끈:4종. 길이 86㎝ 73연의 호박제품과 길이 85.8㎝ 72연의 백색 골제품(骨製品), 길이 84㎝ 74연의 오칠목제품(烏漆木製品), 길이 84㎝ 302연의 밀화제품이 있다.

⑤ 관자:2종. 지름 1.7㎝의 금관자 한 개와 지름 3.7·5.2·1.1·9.1·9.1·3㎝의 옥관자 여섯 개가 있다.

⑥ 유서통:1개. 서찰을 담아두는 것으로 대나무의 마디 하나를 이용하여 만들었다. 길이 49㎝, 지름 8㎝로, 양끝에는 장식을 박고 끈을 달았으며, 중심은 타원형으로 오려내어 자물쇠장치를 하였다.

⑦ 동국지도서애선생수택본(東國地圖西厓先生手澤本):1점. 세로 36㎝, 가로 61㎝로 여기에 삼수·갑산·단천·길주·명천과 육진이 포함되어 있는데, 아래 좌단은 손상되어 있다.

(2) 서애선생모부인곤문기(西厓先生母夫人昆文記) 1축. 유성룡의 모부인 김씨의 분재기로서 세로 67.2㎝, 가로 362㎝의 한지 두루마리에 행서로 쓰여 있다. 부분적으로 좀이 먹은 흔적이 있으나 매우 예가 드문 자료이다.

(2) 고문서

① 광국공신녹권(光國功臣錄券):1축. 한석봉의 글씨로 적혀진 것으로 유성룡은 3등이다. 날짜는 1590년 8월로 되어 있다.

② 도체찰사교지(都體察使敎旨):1매. 1592년 12월 23일에 내린 것이다.

③ 영의정교지(領議政敎旨):1매. 1592년 5월 2일에 내린 것이다.

④ 판중추부사교지(判中樞府事敎旨):1매. 1593년 2월 24일에 내린 것이다.

⑤ 불윤비답(不允批答):3매. 1596년 9월과 1598년 2월, 1600년 11월에 있었던 정사(呈辭)에 대한 불윤비답이다.

⑥ 정경부인교지(貞敬夫人敎旨):1매. 1596년 10월 9일자로 부인 이씨에게 내린 교지이다.

⑦ 풍원부원군교지(豊原府院君敎旨):1매. 1603년 10월 7일에 내린 것이다.

⑧ 호성공신교지(扈聖功臣敎旨):1매. 세로 37.3㎝, 가로 186㎝의 비단에 붉은 줄을 치고 해서(楷書)로 쓴 것으로 2등에 봉하여졌다. 날짜는 1604년 10월로 되어 있다.

⑨ 광국공신녹권:2매. 1605년과 1606년에 내린 공신과 녹권이다.

⑩ 노비하사교지(奴婢下賜敎旨):2매. 1606년 10월과 1638년 10월에 내린 것이다.

⑪ 문충공시호교지(文忠公諡號敎旨):1매. 1627년 7월 10일에 내린 것이다.

⑫ 제문(祭文):3매. 1607년 6월 8일에 선조와 왕세자(광해군)가 보낸 제문 각 1매와 1794년 4월 1일에 정조가 내린 제문이 있다. 정조는 화성을 조성할 때 유성룡의 축성방략을 보고 감동하여 내린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이 유물들은 유성룡 선생의 개인사 연구 및 당시의 사회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大典會通』
『永慕閣』(西厓先生紀念事業會, 1977)
「韓國의 甲胃」(李康七, 『考古美術』136, 韓國美術史學會, 1978)
문화재청(cha.go.kr)
집필자
이강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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