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림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미국으로 노동 이민하여 공립협회, 흥사단, 한인공동회, 대한인국민회 등에서 활동하였고, 노동으로 번 수입의 일부를 기부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실업가 ·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쌀의대왕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6년(고종 23) 1월 19일
사망 연도
1973년 1월 26일
출생지
함경남도 정평군 창덕면 삼봉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김종림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교육위원,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집행위원, 북미지방동지회 대표회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86년(고종 23)에 태어나 1973년에 사망했다.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로 이민하여 ‘쌀의 대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실업가로 크게 성공하였다. 임시정부의 비행기대 편성 방침에 호응하여 자신의 농장에 비행훈련장을 건설하고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을 후원하고 선전할 목적으로 한인공동회를 설립하였다. 나성(LA)한인공동회, 대한인국국민회,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등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미국으로 노동 이민하여 공립협회, 흥사단, 한인공동회, 대한인국민회 등에서 활동하였고, 노동으로 번 수입의 일부를 기부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실업가 · 독립운동가.
개설

함경남도 정평군 창덕면 삼봉리(定平郡 昌德面 三峯里)에서 부친 김도식(金道湜)과 모친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1906년에 마지막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로 이민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06년에 3월부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였으며 1909년에 북미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였다. 솔트레이크(Salt Lake) 철도건설 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1월 중에 공립협회 솔트레이크 지방회 회원으로 입회하였다. 이후 비살니아(Visalia), 프레스노(Fresno) 등지에서 노동일을 하였다.

1909년 2월에 공립협회가 하와이 한인협성회와 통합을 이루어 국민회로 재편되었을 때, 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에서 법무원, 총무 겸 학무원 일을 맡았다. 김종림은 전도유망한 청년들의 대학 학비를 대주는 등 경제적 지원을 하였고 공립신보사에 의연금을 기부하며 재미 한인의 언론 활동을 지원하였다.

1910년에 들어와 고향에서의 농업에 종사했던 경험을 살려 땅을 임대해 오렌지 · 포도 · 채소 밭을 일구고 감자농사도 지었다. 노동과 농사로 번 자금으로 1911년 스탁톤(Stockton)에서 ‘허리상점’을 열었다. 그리고 1912년 경부터 프린스톤(Princeton)에서 벼농사에 착수했는데, 1914년에 100에이커(acre)의 면적에서 6,200여 석(䄷)을 수확하였고 1915~1916년의 농작도 풍작을 이루었다.

여기에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 특수로 인해 쌀값이 폭등하자, 김종림은 실업가로서의 탄탄한 기반을 닦게 되면서 한인사회에서 ‘쌀의 대왕’으로 불리우는 명성을 얻었다. 1913년 흥사단이 창립되었을 때 8도 대표 중 함경도 대표로 참가하였으며, 흥사단원과 대한인국민회원들이 주주로 참여한 북미실업주식회사에도 주주로 참여하였다. 1918년 3월 10일, 백엘리쓰(Alice Paik)와 결혼해 슬하에 1녀 2남의 자녀를 두었다.

1920년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의 해’를 선포하고 비행기대 편성의 방침을 세웠다. 이 소식이 미주 한인사회에 전달되자 김종림은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과 의논하여 자신의 농장 중 40에이커(1에이커 1,224.204평) 규모의 땅에 비행훈련장을 건설하고 비행군단 결성과 함께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였다. 15명의 훈련생을 선발하고 비행 훈련에 들어갔으나 1920년 11월 초 추수기에 대홍수가 불어닥치자 그의 벼농장도 큰 피해를 입게 되었으며 비행사양성소는 1921년 4월 중순경 문을 닫고 말았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소식이 미주에 전달되자 김종림은 광주학생운동을 후원, 선전할 목적으로 1930년 1월 한인공동회를 설립하였고, 3·1절 기념식을 기해 나성(LA)한인공동회를 결성하여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한편 대한인국민회 교육위원으로 활약하면서 국어학교 설립을 위한 후원금 모금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김종림은 한인공동회의 멤버들과 함께 중국후원회를 조직했으며 1940년 5월에 발족된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8월에 개최된 북미지방동지회 대표회에서 회장에 피선된 후 LA동지회 북미총회관 매수와 동지회 북미총회 기관지 『북미시보(北美時報)』 창간을 적극 주도하였다.

광복 후 김종림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을 후원하여 6,873달러를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했으며 60세의 나이에도 벼농사를 지으며 농한기에 북미동지회 사무를 보았다. 사회복지 사업에 뛰어들어 고아원과 양로원을 건립하는 등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으며, 고국에 수해가 닥쳤을 때 대한부인구제회와 협력하여 한국의 이재민 동포 구제운동에 참여하였다.

김종림은 자신이 기금을 낸 양로원에서 말년을 보내며 1973년 1월 26일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서거하였다. 그의 유해는 2009년 4월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유가족으로는 미국에 장녀 코라 오가 생존해 있고 자부(子婦)인 큰며느리 로스 김(Rose Kim)과 외손자 스티븐 김과 외손녀 스테파니 번이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상훈과 추모

1971년 광복절에 “오랜 기간 해외에 거주하면서 한국인사회의 융화와 복리증진에 기여해 왔으며, 국귀선양에 이바지한 공”으로 대한민국 외무부장관 김용식 명의의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新韓國報』
『國民報』
『共立新報』(1907.8.16; 1908.11.4; 1909.1.27)
『新韓民報』(1915.12.9; 1917.4.26; 1918.1.17, 3.7; 1919.1.30, 8.19.)
『北美時報』(1945.12.15; 1946.1.15)
『義勇報』(1941년 3월호)
「김종림 흥사단 이력서」(독립기념관 소장, 미출간자료)
「김종림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독립기념관 소장, 미출간자료)
「김종림관련 문건 자료」(독립기념관 소장, 미출간자료)
『미주 국민회 자료집』(도산학회 편,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2005)
『우남이승만문서』(우남이승만문서편찬위원회편, 현대한국학연구소, 1998)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편, 1976)
『못잊어 화려강산』(곽림대, 대성문화사, 1973)
「재미실업가 김종림의 생애와 독립운동」(이명화,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43, 2012)
집필자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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