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에는 1913년 4월 19일 호놀룰루에서 자녀의 국어교육 장려, 일화(日貨) 배척, 교회와 사회단체의 후원 및 재난동포의 구제 등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인부인회가 조직되어 국내외의 재난동포 구제사업을 하고 있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15일 손(孫)마리아와 황(黃)마리아 등 하와이 각 지방 부인대표 41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공동대회를 열고, 독립운동 후원을 결의하고 3월 29일의 2차대회에서 대한부인구제회를 결성하였다.
구제회의 목적은, ① 하와이 부녀사회의 운동역량의 집중, ②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독립전쟁 출정군 구호를 위한 적십자대 훈련, ③ 항일독립 외교선전 후원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외교선전사업을 위한 후원금을 보냈고, 만주의 대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총사령부에 출정군인 구호금을 보냈으며, 충칭(重慶)에 한국광복군 성립 후원금도 보냈다.
또, 3·1운동 때 1,500달러의 구제금을 보냈고, 국내에 재난이 있을 때마다 기독교청년회와 조선일보사·동아일보사를 통해 구제금을 보냈으며, 6·25사변 중에도 구제품을 수합해 보냈다. 회원들이 살림을 절약해 애국애족사업에 바친 재정은 무려 20만달러가 넘었다.
그러나 1928년이승만(李承晩)이 영남출신 이극로(李克魯)를 멸시한 사건으로 인해 영남부인회가 따로 조직되고, 1930년 교민단과 동지회 간의 충돌로 인해 분열되었다. 1949년 1월 분열 시비문제를 극복하고 대한부인국민회를 조직해 통합하였다.
대한부인국민회는 호놀룰루에 중앙부를 두고 라나이와·오아후에 지방회를 두었다. 설립 이래 박금우·승정한·김차순·심영신·박에스터·김아지·박정금 등이 중앙부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