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용천 출신. 아버지는 목사 김국주, 남편은 장로이며 독립운동가인 안병균이다.
1911년 보성여학교 졸업 후 선천의 명신소학교 교사를 거쳐 1915년에 재령의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 교사를 지냈다. 1919년에 동경유학생 김마리아(金馬利亞)와 정신여학교 교사 장선희(張善禧)의 격려에 의하여 재령 3·1만세시위를 준비하고 3월 2일 만삭의 몸으로 학생과 교인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하다가 붙잡혀 징역 6월의 언도를 받았으나 임신부라는 이유로 22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0년 3월 1일 동지 강기원(姜基遠)과 함께 3·1운동 1주년 가두시위를 하다가 붙잡혀 갓난아기를 안고 4개월간 복역하였다. 1920년에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맹을 창설하고, 근우회의 조직활동에 참여하였다.
1925년 평양 숭의유치원 사범과를 졸업한 뒤 20여 년 동안 유치원육영사업에 종사하였다. 1941년 평북노회 성경학교를 수료하고, 1951년에 장로교총회신학교 등을 졸업하고 부산부전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