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운동자간의 분파 투쟁으로 여성동우회가 2분 3파로 분열되자, 사회주의 여성운동가인 박원희(朴元熙)가 30여 회원을 규합하여 1925년 2월에 청년회를 조직하였다.
회의 강령은, ① 부인의 독립과 자유를 확보하며 모성보호와 사회상에 대한 남녀지위평등 사회제도의 실현, ② 부인해방에 관한 사회과학상의 교의(敎義)를 분명하게 하며 이를 보급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적 경제발전론에 입각한 여성해방운동을 목적으로 한 여성단체인만큼 국제사회주의운동의 현상파악 내지 연계에 노력하였다.
국제부인의 날을 철저하게 지키며, 부인강좌에도 ‘조선부인’과 ‘구라파부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국제사회주의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을 추진하도록 의식화하기에 노력하였다. 여성동우회에서 분파된 경성여자청년동맹 등과 더불어 사회주의여성단체를 총합하여 1926년에 중앙여자청년동맹을 새로 발족시키기 위하여 이 청년회를 해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