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3월 29일인천의 박우리바·여누이사·정헤스터·장마리아·김쓸비여·송전심 등 기독교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발기하였다.
발기취지는 “외채를 진 국민이 태평히 앉아 있을 수 없으며, 남녀간에도 평등적인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있는 것이므로 여자라고 예법만 지킬 수 없으니, 여자들은 조석간에 밥 한술씩 덜 먹고 모은 쌀로 국채를 보상하여 영원한 자유를 찾고 독립 상등국이 되자.” 는 것이었다.
발기 당시 회원수는 80여 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20명을 권고위원으로 결정하였다. 위원 두 사람이 한 동리씩 맡아 여성들을 참여하게 하는 권고활동을 하게 하였다.
활동한 지 수일 만에 회원이 5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음력 2월 한달 동안 모은 의연미(義捐米)가 18섬 8되 8홉이었고, 의연금은 동화 254원 36전이었으며, 이 밖에 한 냥짜리 은비녀 두 개가 들어왔다. 『황성신문』을 비롯한 당시 신문에서는 적성회활동이 남자들에 의하여 조직된 국채보상단연회(國債報償斷烟會)보다 더 활발하다고 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