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우회는 1927년에 조직되었던 독립운동 및 여성운동 단체이다. 3·1운동 후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된 항일여성단체들이 1927년 신간회의 탄생을 계기로 통합적인 여성운동을 전개하고자 조직하였다. 여성의 공고한 단결과 지위향상을 강령으로 삼았고 운동 목표로는 봉건적 굴레에서 벗어나는 여성 자신의 해방과 일제침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양대 방향이 제시되었다. 1930년에는 전국에 6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하고 일본·만주 등 해외에 지부를 두는 등 활발하게 여성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내부의 분열과 자금난 등으로 정식 해산 발표도 없이 1931년 이후 해체되었다.
1919년 3 · 1운동 직후에 조직되어 활약한 대부분의 항일여성단체들이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여성운동은 교육운동, 민족경제진흥운동, 종교계 여성단체를 통한 신앙운동이나 생활향상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여성운동이 1924년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조선여성동우회가 조직된 뒤부터는 민족주의적 방향과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양분되었다. 분열된 국내외의 항일민족운동을 통합해 보다 강력한 민족운동으로 추진하기 위해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다. 여성계에서도 여성운동의 통합론이 일어나, 마침내 그 해 5월에 근우회가 조직되었다.
창립 취지는 “과거의 여성운동은 분산적이었으므로 통일된 조직도 없고, 통일된 목표나 지도정신도 없어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므로, 여성 전체의 역량을 견고히 단결하여 새로운 여성운동을 전개하려는 것”이었다. 강령은 여성의 공고한 단결과 지위 향상이었다. 운동 목표로는 봉건적 굴레에서 벗어나는 여성 자신의 해방과 일제 침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양대 방향이 제시되었다.
창립의 중요 인사로는 김활란(金活蘭) · 유영준(劉英俊) · 이현경(李賢卿) · 유각경(兪珏卿) · 현신덕(玄信德) · 최은희(崔恩喜) · 황신덕(黃信德) · 박원희(朴元熙) · 정칠성(丁七星) · 정종명(鄭鍾鳴) 등이었다.
조직은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 각지 및 일본 · 만주 등 국내외에 지부를 두었다. 본부에는 서무부 · 재무부 · 선전조직부 · 교양부 · 조사부 · 정치연구부 등을 두었다. 해마다 지회가 늘어나서 1930년까지 전국에 걸쳐 60여 개의 지회가 설립되었다. 지회에도 본부와 비슷한 부서를 두고 활동했으나, 각 지회의 특수성에 따라 학생부 · 출판부 등이 추가되는 곳도 있었다.
회원은 만 18세 이상의 여성으로, 근우회의 강령과 규약에 찬동하며 회원 2명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입회할 수 있었다. 입회금 1원과 매월 20전 이상의 회비를 납부해야 했다. 1929년 5월에는 총 40여 개의 지회에 회원수가 2,971명에 이르렀다. 이들의 직업을 살펴보면 가정부인이 1,256명, 직업부인이 339명, 학생이 194명, 미혼여성이 181명, 노동여성이 131명, 농촌여성이 34명이었다.
지회의 활동은 근우회의 강령과 목적의 범위 안에서 그 지역 사회에 알맞도록 자치적으로 행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활동은 매년 1회씩 개최되는 전국대회에 보고하여 평가되었다. 전국대회에서는 토의를 거쳐 운동의 새 방향을 결정하였다. 활동 및 주요 사업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선전 및 조직강화를 위한 활동으로, 매월 15일을 선전일로 정해 회원의 가정 방문, 여성문제 토론회 및 각종 강연회 개최 등을 통해 조직을 강화하였다.
둘째는 교양부 중심의 여성계몽운동으로, 부인강좌와 순회강연, 각 지회에서의 야학운동 등으로 여성들의 문맹을 퇴치하고, 여성으로 하여금 남녀평등의 사회의식과 자주적 민족의식을 깨우쳐 민족운동의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셋째는 사회운동의 실태 조사와 참가로, 1927년 6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의 맹휴사건과 그 해 11월 중앙고등보통학교의 맹휴사건, 12월 제일고등보통학교의 맹휴사건 등을 조사하였다. 1928년 2월에는 고성보통학교(固城普通學校) 학생타살사건의 진상을 조사해 성토하였다. 1929년 이후에는 확대되는 여공 파업의 진상을 조사하고 지원했다. 광주학생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항일학생운동을 지도, 후원하기도 하였다.
넷째는 해외동포(海外同胞)의 구호를 위한 각종 모금운동 및 회원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일로서, 관북지방의 수재민 구호모금운동, 경상도 일대 한재민 구호대책 등이 그것이다. 1929년 제2회 전국대회에서는 구체적인 행동강령을 채택하였다. 교육의 성별차별 철폐 및 여자의 보통교육 확장, 여성에 대한 봉건적 · 사회적 · 법률적 일체 차별의 철폐, 일체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 조혼 폐지 및 혼인 · 이혼의 자유, 인신매매 및 공창 폐지, 농민부인의 경제적 이익 옹호, 부인노동자의 임금차별 철폐 및 산전산후 2주간의 휴양과 임금지불, 부인 및 소년노동자의 위험노동 및 야간작업 폐지, 언론 · 집회 · 결사의 자유 등이었다.
이것은 한국 여성을 우매충직한 여성으로 만들려는 일제의 식민지 여성정책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또한 온갖 봉건적 인습의 잔재로부터의 해방, 여성의 경제적 · 사회적 이익에 대한 철저한 보장을 주장한 것이었다. 여성운동이 이처럼 뚜렷한 목적의식 아래 통일적으로 추진되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근우회의 행동 강령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도 적극적인 전개 방안이 강구되어야 하였다. 특히, 여공 파업 등의 여성 노동운동은 투쟁적 의지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이와 비례해서 일제의 탄압도 강도를 더해갔다. 더구나, 1928년부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등을 중심으로 기독교 여성운동을 추진했던 유각경 · 김활란 · 황에스터 · 최은희 등이 근우회에서 퇴진하자 근우회는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는 여성운동의 통합 · 통일이라는 당초의 목표에 어긋나는 것으로, 와해의 기미가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자금난까지 겹쳐 1930년부터 근우회 운동에 대한 자체 비판이 높아지기 시작했으며, 각 지회간의 연계가 점차 무너져갔다. 1931년 2월 주을지회(朱乙支會)에서 처음으로 해체론이 제기된 이래, 부산 · 북청 · 신의주 등지에서도 논의가 거듭되었다. 당시 근우회 안에서는 해체론이 심각하게 주장되고 있었는데 반해 일반 사회에서는 조직과 기능을 보완해 계속해서 추진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스스로의 역량 부족과 일제의 탄압 등으로 끝내 정식 해산발표도 없이 해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