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일제강점기 때,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참여하였고,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 교육자·독립운동가.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918년 선교사 홀(Hall,R.S.)의 권유로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김마리아 · 현덕신(玄德信) · 송복신(宋福信) · 정자영(鄭子暎) 등과 동경여자유학생회를 조직해 유학생 간의 친목과 더불어 배일사상 고취와 애국심 고양에 노력하였다.
1919년 2월 6일의 동경유학생회에서 남녀는 두 개의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므로 여성도 독립운동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고 열변하였다. 2·8독립선언에 참여했다. 주동 학생으로 경찰에 잡혔다가 곧 풀려났다.
이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여성대표를 파견할 임무를 띠고 몰래 입국하였다. 여성대표로는 신마실라(申麻實羅)가 선정되었다. 그의 여비 마련을 위해 노파 · 일본 여인 등으로 변장해 지방 연고지를 찾아 모금하였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가던 3월 19일 일본경찰에 잡혀 그 해 8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여성계의 독립운동이 부진함을 개탄하던 김마리아와 더불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확대 재조직하고 총무직을 담당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에로의 군자금을 송달하던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실상이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임원이 일제히 검거될 때 함께 검거되어 대구경찰서로 넘어갔다.
재판 결과 3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하면서 동포 죄수들을 선도 계몽하였다. 형기 1년을 남기고 가출옥한 뒤 이화학당 대학부 3학년에 편입하였다. 졸업 후 모교의 사감 겸 교사로 봉직하였다.
1925년 미국으로 유학해 콜롬비아대학에서 교육학 석사를 받았다. 1928년 귀국한 뒤 농촌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1930년 혼인 후 남편과 하얼빈으로 가서 일본인 농장에서 고생하는 교포들에게 애국적인 계몽을 하였다.
광복 후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여성문제 타결에 노력하였다. 6·25중에는 마침 미국에 있었으므로 미국의 12개 주를 순방하면서 구호품을 모아 조국으로 보냈다. 1952년에 귀국해 한미기술학교를 설립한 뒤 전쟁미망인과 고아에 대한 기술교육을 하였다.
1960년 3월 1일 중앙여자고등학교 주최 3·1운동선도자 제1회 찬하회에서 찬하자가 되었다. 1967년 3·1여성동지회를 조직해 항일운동에서 활약한 여성동지를 규합하였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 『한국여성독립운동사』(3·1여성동지회, 1990)
- 『구원의 횃불』(중앙여자고등학교, 1971)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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