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애덕(愛德) · 애시덕(愛施德). 13세 때 평양 정진여학교(正進女學校) 3학년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곧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해 1910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곧장 평양의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 교사로 부임해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13년 동료 교사 김경희(金敬喜)와 교회 친구 안정석(安貞錫)과 더불어 비밀결사대인 송죽회(松竹會)를 조직하였다. 애국사상이 깊은 학생들을 엄선해 정신교육을 행하고 송죽회의 자회(子會) 설립을 지도하였다. 동시에 군자금을 마련해 중국의 항일독립단체에 송금하였다.
1918년 선교사 홀(Hall,R.S.)의 권유로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김마리아 · 현덕신(玄德信) · 송복신(宋福信) · 정자영(鄭子暎) 등과 동경여자유학생회를 조직해 유학생 간의 친목과 더불어 배일사상 고취와 애국심 고양에 노력하였다.
1919년 2월 6일의 동경유학생회에서 남녀는 두 개의 수레바퀴와 같은 것이므로 여성도 독립운동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고 열변하였다. 2·8독립선언에 참여했다. 주동 학생으로 경찰에 잡혔다가 곧 풀려났다.
이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여성대표를 파견할 임무를 띠고 몰래 입국하였다. 여성대표로는 신마실라(申麻實羅)가 선정되었다. 그의 여비 마련을 위해 노파 · 일본 여인 등으로 변장해 지방 연고지를 찾아 모금하였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가던 3월 19일 일본경찰에 잡혀 그 해 8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여성계의 독립운동이 부진함을 개탄하던 김마리아와 더불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확대 재조직하고 총무직을 담당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에로의 군자금을 송달하던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실상이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임원이 일제히 검거될 때 함께 검거되어 대구경찰서로 넘어갔다.
재판 결과 3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생활을 하면서 동포 죄수들을 선도 계몽하였다. 형기 1년을 남기고 가출옥한 뒤 이화학당 대학부 3학년에 편입하였다. 졸업 후 모교의 사감 겸 교사로 봉직하였다.
1925년 미국으로 유학해 콜롬비아대학에서 교육학 석사를 받았다. 1928년 귀국한 뒤 농촌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1930년 혼인 후 남편과 하얼빈으로 가서 일본인 농장에서 고생하는 교포들에게 애국적인 계몽을 하였다.
광복 후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해 여성문제 타결에 노력하였다. 6·25중에는 마침 미국에 있었으므로 미국의 12개 주를 순방하면서 구호품을 모아 조국으로 보냈다. 1952년에 귀국해 한미기술학교를 설립한 뒤 전쟁미망인과 고아에 대한 기술교육을 하였다.
1960년 3월 1일 중앙여자고등학교 주최 3·1운동선도자 제1회 찬하회에서 찬하자가 되었다. 1967년 3·1여성동지회를 조직해 항일운동에서 활약한 여성동지를 규합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으며,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