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계몽운동 ()

사건
농민의 의식과 지식 · 기술 등을 계몽하거나 개발하기 위하여 학생들 또는 학식 있는 지도층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단체를 형성하여 농촌사회에 봉사하는 사회교육적 활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농민의 의식과 지식 · 기술 등을 계몽하거나 개발하기 위하여 학생들 또는 학식 있는 지도층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단체를 형성하여 농촌사회에 봉사하는 사회교육적 활동.
개설

운동의 주체는 농민이 아닌 지식인 학생이므로 성격상 농민들이 주체가 된 농민운동과는 구별된다. 또한 농민의 의식 또는 지식을 개발하는 교육활동이나 학교교육과는 구분되는 사회교육 현상이며, 민족운동의 측면에서는 사회문화운동의 영역에 해당된다.

역사적 배경

이 운동은 이미 한말부터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으나, 식민통치 항쟁기에는 독립기반을 형성하기 위한 민족운동의 한 형태로 추진되었으며, 광복 후에는 농촌사회의 근대화를 목표로 전개되었다.

농촌계몽운동의 원류는 한말 계몽운동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대한제국이 성립된 1897년경만 해도 근대 민족운동은 정부 주변의 지식인 운동과 민중운동이 분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개 을사조약 이후부터는 이 둘이 합류하여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이것은 민족의 대중적 역량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으로 민족운동의 새로운 양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권을 상실(1910년)한 후 일제의 무단통치로 거의 봉쇄당하자, 계몽운동은 당시의 의병운동과 합류하여 해외의 독립군 양성교육 등 국외 독립운동으로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국내에서는 주로 사립학교의 민족교육으로 재조직되고 있었을 뿐 사회교육 현상은 차단되고 말았다.

그 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뒤이어 일제가 무단통치를 철회하게 됨에 따라, 한국인은 계몽운동의 정신적 맥락에서 민족의 대중적인 역량을 증대시키기 위한 농촌계몽운동을 일으켰다. 때마침 조선본위교육운동(朝鮮本位敎育運動)이 일어나고 있어 이론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도시의 지식 청년과 학생은 농촌 계몽에 앞장섰다.

조선본위교육사상은 1918년 미국에서 결성된 진보주의교육협회(The Progressive Education Association)의 교육이론이 우리 나라에 전파되면서 아동 본위의 이론을 수용하여, “조선의 아동은 당연히 조선을 본위로 해야 한다.”는 이론으로 정착됨에 따라, 진보주의 교육사상과 민족주의사상이 통합되어 형성된 이론이었다.

당시에 전개된 농촌계몽운동은 식민교육의 내용에 맞서 민족교육을 심화시키는 데 주력하였고, 일제가 문맹정책 또는 우민정책을 통해 교육의 기회를 통제하는 데 대항하여 농촌의 교육적 환경을 확산시켜 갔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구호 아래 적령 아동을 모아 학교교육에 대신하는 야학 등을 실시하였으며, 문맹자를 위한 성인교육과 여자들을 계도(啓導)하기 위한 여성교육을 추진하였다. 또한 농촌의 생활개선과 농업의 개량, 사상 계도를 도모하였다.

농촌계몽운동의 형태는 농사에 종사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므로 주로 농사일을 끝낸 밤시간에 강연회·토론회·독서활동·야학 등으로 나타난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농한기인 겨울에 더욱 폭넓게 실시되었으며, 학생의 방학기인 한여름과 한겨울에 많이 실시되었다. 방학 때 학생과 도시의 지식인이 계몽운동을 위해 농촌으로 간다고 하여 귀농운동(歸農運動)이라고도 불렸다.

1920년대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민족이 총력을 기울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시기였다. 정치단체는 지하활동을 폈고, 사회·문화 단체는 합법을 가장하고 백방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조선청년회연합회·조선교육회·조선여자교육회·조선학생회·조선노농총동맹·조선농민사 등의 사회·문화 단체와 천도교청년회·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등의 종교단체까지 농촌계몽운동에 조직적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계몽운동이 1920년대 농촌을 풍미하자 1929년과 1931년부터는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 등 언론지가 조직적으로 가담하게 되었고, 조선어학회도 참가하게 되었다. 따라서 1930년대 전반기는 농촌계몽운동이 절정에 달하여 당시 문화운동의 주류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1930년대 전반기에 농촌계몽운동이 문화운동의 주류로 부각된 데에는 또 다른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그 하나는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뒤 민족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지식 청년과 학생이 농촌으로 피신하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1931년 신간회(新幹會)의 해소가 말해 주듯이, 민족운동에서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이 분열함으로써 민족운동에 일고 있던 감상적인 기미가 당시 낭만주의 흐름과 함께 학생계에도 영향을 미쳐 지식 청년과 학생이 농촌에서 민족의 감상을 불태워 보려는 풍조가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내용

이러한 배경 속에서 농촌계몽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깊은 산골에서도 한글을 익히며 민족의 운명을 토론하는 소리가 드높아 갔다. 농촌에서 지식 청년과 학생, 농민, 농촌의 어린이가 민족의 공감대를 통해 독립의식을 고조시켜 갔던 것이다.

이광수의 <흙>과 심훈의 <상록수>는 이러한 농촌 광경을 묘사한 작품이었다. 이렇게 민족의 대중적 역량이 고조되고 있는 것을 일제는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1932년부터 농촌진흥정책이라는 이름 아래 마을마다 부락진흥회를 결성하고 그들대로 식민적 간행물과 강연, 야학 등을 통해 농촌계몽운동을 흡수하려는 노력을 꾀하면서 계몽운동의 민족적 분위기를 혼탁하게 만들며 방해하였다.

1935년에는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의 귀농운동을 금지시켰으며, 그 해 9월 2학기부터는 중학교에 이른바 배속장교를 배치하여 군국주의 교육을 강화하는 등, 학생활동을 통제하고 민족적 야학당도 폐쇄하여 농촌계몽운동은 봉쇄되고 말았다.

귀농운동이라는 용어는 1926년부터 널리 쓰이게 되었다. 당시 천도교 조선농민사에서 ≪조선농민 朝鮮農民≫이라는 교양잡지를 월간으로 간행하고 있었는데, 1926년의 7·8월호를 귀농운동호로 편집했다가 원고 전부를 압수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뒤 귀농운동이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크게 퍼져갔다.

이 때 수많은 민족 교양잡지에서는 귀농운동에 대한 기사를 실었고, 특히 농촌 야학에 교원이 부족한 실정임을 소개하며 방학을 맞은 학생에게 애국적 봉사를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방학이면 민족운동에 불타던 당시의 학생이 농촌으로 몰려갔다.

농촌에서 농사와 가사를 돕고 강연회를 열고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퇴치는 물론 농민의 사상을 계도하고 지식을 보급하였다. 이들은 고향에서 농민운동의 지도자로 자리잡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족적 분위기를 보다 능률적이고 조직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1929년 조선일보사에서 문자보급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한글 보급을 중심으로 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1931년에는 브나로드운동(vnarod運動)이라는 이름으로 동아일보사가 계몽운동에 참가하였다.

즉, 신문사가 주도하여 경비를 부담하면서 방학중인 학생을 계몽 요원으로 농촌에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동아일보사에서만도 1,321개 처에 5,721명의 학생을 파견했고, 배포된 교재는 60만 부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어학회에서도 한글 보급을 위하여 전국 각처에서 강연회를 여는 한편, 한글 책자를 보급하며 학생활동에 의지하여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때마침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나와 전국에 보급되니 나라는 빼앗겨도 말과 글과 얼은 지킬 수 있는 국민적 기초가 마련되었고, 민족이 광복을 찾은 아침부터 한글로 글을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민족교육의 바탕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한글 보급에는 기독교회의 여름성경학교 학생활동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았는데, 비록 선교활동이었으나 그 교재가 한글 성경이었기 때문이다. 귀농운동은 형식적인 교육활동에 국한되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1930년 귀농운동에 참가했던 학생의 수기를 보면, “…… 이러한 때에 열렬한 힘으로 민족에게 자각을 주려는 웅변가도 좋기는 좋다. 교육이 보급되지 않은 고로 그네들에게 사재를 기울여 가며 가르쳐 주는 것도 좋기는 좋다. …… 농촌생활이 닥치면 주저 말고 농촌에 나아가서 봄·여름이면 오줌동이를 이고 텃밭에 나가며, 호미를 들고 밭으로 가며, 다리 걷고 논밭을 매며, 가을이면 조·벼를 추수해 들이며……(배화 칠십년사).”라고 되어 있듯이, 농민과 함께 생활하고 민족의 공감을 형성하여 농민의식을 높이기도 했으며, 여기서 학생에게 애국 정열을 다시 일깨워 준 효과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농민 야학은 귀농운동의 한 형태였던 것 외에 거의 상설 야학으로 운영되었다. 한말부터 노동 야학으로 많이 불렸는데, 그것은 지주 이외의 농민은 노동자의 개념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농민 야학도 1920년대에 활발히 전개되어, 1927년 함경남도 함흥군의 경우 공사립보통학교 생도가 4,500명인데 야학 생도수는 3,848명에 이를 정도였으며, 경상북도 영양군은 6개 면에 1개 교의 보통학교가 있었는데 야학당은 28개 소에 설립되어 있어 조선농민사로부터 모범 야학 표창을 받았다.

조선농민사에서 표창한 317개 학당의 실태에 의하면, 1920년대 중반기에 가장 많이 설립되었고 그 중 남녀 공학이 30%였으며, 성인교육과 적령 아동교육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교원은 지방의 청년과 학생이었는데, 무보수로 봉사하였다.

야학당은 과거의 서당이 아니면 큰 집을 빌려서 쓰기도 했으나, 마을사람들이 힘을 모아 회관을 건립하여 경영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농민이 야학회 또는 수양회(修養會)를 만들어 공동으로 품을 팔아 회관을 건립하여 경영한 경우도 있었다.

상설 야학이라고 해도 농번기에는 독서운동으로 여가를 메우고, 농한기인 11월부터 4월까지 실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적령 아동의 야학만은 일년 내내 실시되었다.

교과목은 국어·산술·작문·습자·강화(수사학)·한문·역사·일본어·농업 등으로 민족 교과와 실용 교과목들이었다. 일본어는 일제하였으므로 실용 과목으로 채택되어 있었다.

주로 사용되었던 교재는 ≪농민독본≫·≪농촌위생≫·≪농민과학≫·≪대중산술≫·≪한글독본≫·≪조합기장법≫·≪비료사용법≫·≪과수재배≫ 등이었는데, ≪농민독본≫에는 제7과에 ‘자유’라는 단원을 설정하여 인간의 천부인권을 설명하고 있어, 당시 농민 야학의 교육내용과 풍토를 짐작하게 한다.

농민은 교재를 구입하기 어려웠으므로 공동으로 한 벌을 구입해서 사용하거나 여러 교재를 단일본으로 재편집한 프린트 교과서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대개 ‘농민독본’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오늘날 다양한 형태를 지닌 것들이 발견되고 있다.

광복 후의 농촌계몽운동은 주로 학생단체와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학생단체는 농촌봉사활동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농촌의 근대화를 실현시키는 데 기여하고 동시에 농촌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하였으며, 종교단체는 농촌사회에서의 선교와 봉사를 목적으로 진행하였다.

그 후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정부가 주도하는 가운데 농촌의 소득을 높이고 자조·자립·협동 등의 덕목을 앞세운 ‘새마을운동’으로 나타났다. 정부 주도형의 새마을운동 이외에도 농촌의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계몽운동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농촌계몽운동은 주체가 농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농민운동이 아니라 농촌운동이었다. 그리고 교육활동이면서 학교교육이 아니라 사회교육의 범주에 속한다. 그리고 일제의 지배체제에 항거하여 민족운동의 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역사적 의미도 위의 세 측면에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농민운동과의 관계에서 보면, 농촌계몽운동이 농민운동 주변의 사회운동이었기 때문에 사회문화운동의 폭을 넓혀 주었던 것은 물론, 농민운동의 발전을 촉진시켰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당시 농민운동은 소작쟁의(小作爭議)와 공동 경작 같은 협동조합운동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것이 1920년대 이래 발전할 수 있었던 그 기반으로서의 의미가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에 교육사 측면에서, 일제의 식민교육에 대처한 민족교육의 일환으로서 그 의미를 갖는다. 식민교육은 일본 신민화(臣民化) 또는 노예화 교육이었는데, 이에 항거하여 농민의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식민교육의 문맹정책 또는 우민정책 때문에 농민의 교육 기회가 극히 제한되고 있었는데, 계몽운동으로 극복하면서 농민의 지식 계발에 공헌하였다. 다음에는 민족운동사 측면에서, 민족의 대중적 역량을 증대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1930년대 일제가 만주침략을 감행하면서 전시체제로 전환하는 가운데 민족운동이 대중운동에 주력하게 되었을 때, 농촌계몽운동이 보다 확산되어 농민조합운동과 함께 민족운동의 주류로 부각되었다는 데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끝으로 광복 후의 농촌계몽운동은 주로 농촌사회의 근대화를 목표로 한 것으로, 농촌사회의 소득증대와 생산력의 조직화에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朝鮮農民』(朝鮮農民社, 1925∼1933)
『朝鮮農村團體史』(文定昌, 日本評論社, 1942)
『韓國近代敎育史』(孫仁銖, 延世大學校 出版部, 1971)
『抗日學生民族運動史硏究』(鄭世鉉, 一志社, 1975)
『日帝下民衆敎育運動史』(盧榮澤, 探求堂, 1979)
『日帝下韓國農民運動史』(趙東杰, 한길사, 1979)
집필자
조동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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