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金慶喜)는 일제강점기 송죽회(松竹會) 및 평양 3·1운동에 참여한 여성독립운동가이다. 한자로 金敬喜 혹은 金敬姬라고도 쓴다.
1888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를 졸업하였다.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 교사로 근무하면서 1913년 비밀결사인 송죽회를 조직,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으나 병으로 귀국, 1919년 9월 19일에 작고하였다.
김경희는 평양의 숭의여학교 교사 황애시덕(黃愛施德)과 이효덕(李孝德), 기독교인인 안정석(安貞錫) 등과 함께 박현숙(朴賢淑) · 이마대(李馬大) · 채광덕(蔡光德) · 송복신(宋福信) 등 20여 명의 학생을 포섭하여 숭의여학교 기숙사에서 송죽회를 결성하고, 제1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송죽회는 절개의 상징인 소나무와 대나무의 합칭으로, 송죽결사대(松竹決死隊)라고도 하였다. 송죽회는 철저한 점조직으로 횡적인 관계는 비밀로 하고 수직적으로만 연결하여 회원 명부도 만들지 않고 이름도 변명(變名)을 사용하면서 비밀 유지에 만전을 기하였다. 회원들은 매주 1회 기도회 형식의 비밀회의를 열었고, 방학에는 수예와 편물 등으로 자금을 마련하여 월 회비 30전을 납부하였다.
송죽회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에게 활동자금과 생활비를 송금하였으며,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는 독립운동가에게는 필요한 숙식비와 여비 등을 제공하였다. 또한 평양 시내에 있는 교회의 부인회들과 연락하여 월례회를 개최하고 전도사업과 여성계몽에 대한 방법을 토의하였다. 1916년부터는 숭의여학교 졸업생으로서 장로교 계통 여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는 회원들을 중심으로 평남, 황해, 전남, 전북, 경남, 제주 등에 지역 조직을 만드는 활동을 펼쳤다.
송죽회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김경희는 1916년에 학생들에게 항일사상을 고취한 혐의로 면직되었다. 1915년에 지리를 가르치던 중 하얼빈을 가리키며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사살한 곳으로, 독립하면 그 곳에 안중근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 사실이 이듬해에 발각되면서 경찰서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다. 이후 김경희는 송죽회 활동을 이어가면서 서문밖교회에서 권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2월부터는 평양 만세시위 준비에 가담하였으며, 3월 1일에 기독교계 여성들을 이끌고 만세시위에 나섰다. 이로 인해 경찰에 쫓기자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평양의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인 안창호의 권유로 귀국을 결심하고 1919년 7월에 평양숭실학교 학생인 김정목(金鼎穆)과 함께 평양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김경희는 평양의 장로교와 감리교의 부인회를 중심으로 추진된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 결성 준비를 도우며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고문으로 얻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1919년 9월 19일에 작고하였다. 대한애국부인회는 두 달 후인 1919년 11월에 결성되었다.
상해의 대한애국부인회는 1920년 1월 17일에 추모회를 열고 김경희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렸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