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옥련(朴玉蓮)은 1914년 12월 12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28년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서 비밀결사인 소녀회(少女會) 를 결성하고,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서 활약하였다. 2004년 11월 21일 사망하였다.
박옥련은 1928년 11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서 장매성(張梅性)의 주도하에 박계남(朴繼男)·장경례(張慶禮)·남협협(南俠俠)·고순례(高順禮)·이금자(李錦子) 등과 함께 광주사범학교(光州師範學校) 뒷산에서 사회주의 사회 실현과 민족 독립, 그리고 여성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인 소녀회를 조직하였다. 소녀회는 학교 안팎에서 회원 확대에 노력하며 매달 1회씩 월례연구회를 가졌다.
소녀회는 1926년에 결성되어 광주학생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비밀결사인 성진회(醒進會)의 후신이다. 1929년 6월 독서회중앙본부가 창립되자 그 하부조직으로서도 활동하였다. 독서회중앙본부는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목포상업학교 등에 하부 조직을 두었다. 독서회중앙본부의 지도자인 김기권(金基權)과 장재성(張載性)이 독서회원의 친목·단결과 재정 지원을 위해 학생소비조합을 조직하자, 소녀회가 주동이 되어 자본금 30원을 출자하였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이 충돌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11월 3일에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였다. 박옥련은 소녀회의 일원으로 가두시위 도중 다친 학생을 치료하고 식수를 공급하고 돌멩이를 나르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또한 구속된 학생들을 돕기 위한 모금에 나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 수감자의 가족들에게 전달하였다.
1930년 1월 1일에 소녀회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생을 대상으로, 광주학생운동으로 구속된 학생들이 석방되기 전에는 시험에 응하지 말고 백지동맹을 단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1월 9일부터 백지동맹에 나섰으나, 학부형회의에서 학교 측에 단호한 처분을 내릴 것을 일임하고, 교사들이 학생들을 설득하면서 난관에 부딪혔다. 1월 13일 시험 시간에 이광춘이 교단에 올라가 식민지 교육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고자 시험을 거부하고 백지동맹을 결성할 것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에 3학년 학생 전부가 백지답안을 제출하였다. 학교 측은 즉각 백지동맹 주모자 4명에게 퇴학, 가담자 37명에게 근신 처분을 내리는 한편 학부형들을 불러 자퇴를 권유하였다. 이에 분개한 학부형 20여명이 퇴학계를 제출하였다.
1930년 1월 15일과 16일 이틀에 걸쳐 소녀회 주동자 12명이 검거되었다. 이 때 박옥련은 다른 회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30년 10월 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