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금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원전동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886년(고종 23) 5월 21일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
관련 사건
3·1운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일제강점기 때, 원전동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생애

1886년 5월 21일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知品面) 원전동(院前洞)에서 출생하였다. 남편은 김태을(金太乙)이다. 1919년 3월 24일 원전동시장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체포, 복역하였다.

활동사항
  1. 영해면의 시위

영덕군의 3·1운동은 기독교계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지품면 낙평동(洛坪洞)에 사는 기독교 장로교회 지도자인 김세영(金世榮)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서울 시위를 목격하고 3월 3일의 고종 인산에 참여한 후 4일에 귀향하였다. 김세영은 곧바로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나 만세시위를 모의하였다. 하지만 김세영은 서울을 다녀온 까닭에 경찰의 예시주시를 받았는데, 다음날에 전격 체포되어 1주일간 예비검속을 당하였다. 이에 김세영을 대신하여 권태원(權泰源)이 시위 준비에 나섰다.

1919년 3월 18일에 영해면의 장날을 맞아 오후 1시에 만세시위가 발발하였다. 이날 시위에는 3,000여 명이 가담하였다. 시위대는 면사무소와 주재소는 물론이고 공립보통학교과 우편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집기를 부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다음날에도 수천 명의 시위대가 만세시위를 계속하였으나, 대구로부터 급파된 보병 80연대 군인 17명과 헌병이 총격을 가하면서 8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1. 지품면의 시위

영해면의 시위는 곧 주변으로 확산되었다. 원전동에 사는 기독교 장로교회의 지도자인 주명우(朱明宇)는 김중명(金重命)을 통하여 김세영이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촉구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 만세시위를 모의하였다. 주명우는 기독교인 10명을 규합하여 원전동 시장 장날인 3월 19일 오전 11시 30분에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시위대와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 헌병주재소 앞에서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연설을 하던 주명우는 경찰에 의해 즉각 체포되었고 군중은 해산을 당하였다. 이때 신분금의 남편인 김태을 역시 검거되었다.

원전동 시장의 다음 장날인 3월 24일 주명우의 부인인 윤악이(尹岳伊)가 “오늘 여기 시장에서 독립운동을 하자”며 독립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제안하자 신분금은 즉시 응낙하였다. 윤악이와 마찬가지로 남편이 검거된 탓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날 정오가 되자 윤악이는 시장통에서 독립선언식을 열고 ‘우리는 여자인데도 한국 독립을 희망하고 한국의 만세를 부르짖는다.’고 연설하였다. 이때 신분금은 시위 군중을 이끌며 만세시위를 하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6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태을 역시 징역 8개월을 받아 복역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7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판결문」(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 1919.4.16)
『독립운동사』 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집필자
김정인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