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말례(朴又末禮)는 1902년 3월 13일 전라남도 순천에서 출생하였다. 광주수피아여학교 학생으로서 1919년 3월 10일 광주 큰 시장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렀다. 1986년 12월 7일 사망하였으며, 이명은 박영자(朴永子)이다.
광주에는 1919년 3월 1일 이전에 도쿄 유학생인 정광호(鄭光好)에 의하여 2·8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나주에 사는 기독교인 김복현(金福鉉)은 3월 3일 고종 인산일을 맞아 서울에 올라갔다가 3·1독립선언서와 격문, ‘독립가(獨立歌)’ 등의 인쇄물을 갖고 3월 6일에 광주로 내려왔다. 김복현은 광주 사정을 잘 모른다며 김강(金剛)에게 시위 준비를 부탁했고 김강은 송흥진(宋興眞), 서정희(徐廷禧), 그리고 숭일학교(崇一學校) 교사인 최병준(崔炳俊)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김복현 등은 거사일을 3월 10일 광주 큰 시장 장날로 잡았다. 그날 오후 3시 반에 시위 군중을 동원하여 독립선언식을 치르고 독립만세를 위치며 시내를 행진하기로 하였다. 서정희는 시민 동원을 맡았고, 최병준은 숭일학교 학생을 동원하여 인쇄물을 배포하는 일을 맡았다. 김강은 수피아여학교 교사인 박애순을 만나 여학생 동원을 부탁하였다. 박애순은 학생들에게 3월 초부터 『매일신보(每日申報)』를 읽어 주고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였으므로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며 광주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나면 적극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있었다.
3월 10일 오후 3시 무렵에 광주 큰 시장에는 1,000여명의 사람이 운집하였다. 박우말례는 이날 교사 박애순의 인도 하에 태극기를 준비하고 2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양림리를 출발하여 광주천(光州川)을 따라 광주 큰 시장에 들어섰다. 큰 시장으로 가는 길에 숭일학교 학생 100여명과 다른 기독교인들이 합세하였다. 북문 쪽에서는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들어왔고, 지산면(芝山面)에서는 수백 명의 농민이 몰려 왔다. 박우말례는 박애순이 김강으로부터 건네받은 약 50장의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나누어주었다.
광주 큰 시장에서 주동자들은 대형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른 후 거리를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위대가 광주경찰서 앞에 이르자 경찰과 기마 헌병이 해산을 요구하며 시위 군중을 체포하였다. 시위대가 경찰서 안마당까지 들어가 독립만세를 부르자 경찰과 기마 헌병은 총칼을 휘두르며 폭력을 가하였다. 박우말례는 시위 현장에서 검거되었다.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2011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