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시위는 3월 14일 하가면 화대동에서 일어났다. 누가 주동한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 날 만세를 부른다는 소식은 집집마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오전 11시에 5000여 명의 군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 군중이 헌병분견소 앞에 이르자 헌병들이 발포하여 5명이 즉사했다.
이 소식에 격분한 하가면민 1000여 명이 이튿날인 15일에 화대시장에 모여 만세 시위를 펼쳤다. 시위 군중이 면장을 구타하고 헌병분견소로 몰려가자 헌병이 총격을 가해 4명이 즉사했다. 이 날 시위로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풍신(董豊信)은 곧바로 시위 현장으로 달려 나와 만세 시위를 이끌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녀는 1921년에 17살의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3월 16일에는 아간면 시장에서 400여 명이 시위를 벌이자 헌병이 출동하여 해산시키고 시장을 폐쇄했다. 3월 17일에는 상고면 보촌동에서 보촌학교 학생과 중평동민이 시위를 일으켰다. 3월 18일에는 우시장에서 7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헌병의 발포로 2명이 즉사했다. 3월 22일에는 운만대 선지곡에서 4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4월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4월 8일에는 서면 우동동에서 우동사립학교 교사가 주도하는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4월 14일에는 서면 명남동에서 군중 200여 명이 만세를 불렀다. 4월 18일에는 상운북면 하장동 시장에서 300여 명이 시가를 돌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명천삼일운동은 화가면 화대동, 아간면 시장, 상고면 보촌동, 운만대 손지곡, 서면 우동동과 명남동, 상운북면 하장동 등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이 중 특히 3월 14일 하가면 화대동에서 일어난 시위는 명천 지역에서 최초로 일어난 시위로서, 함경북도에서 가장 많은 인원인 5,000여 명이 모인 큰 시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