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만세 시위는 3월 8일에 일어났다. 오전 9시 천도교인과 학생 약 250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내를 행진한 후 영덕산에 올라가 만세를 불렀다. 3월 10일 정오에는 조석권(趙錫權)·이욱성(李郁性)·이기주(李基柱) 등이 주동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이 무렵 천도교 북청교구장인 김태종(金泰鍾)을 비롯한 천도교 지도자들은 조직적인 시위를 모의하고 있었다. 3월 8일 서울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장날인 3월 1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시위를 준비했다. 그러나 시위 전날인 3월 10일에 경찰이 천도교당을 급습하여 김태종을 비롯한 주동자들을 잡아갔다.
3월 11일에 주동자는 없었지만, 600여 명의 천도교인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 다른 면의 천도교인이 참여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경찰은 면소재지로 들어오는 길을 봉쇄했다.
3월 12일과 13일에는 기독교인들이 시위를 모의하고 격문을 배포하다가 발각되는 일이 일어났다. 3월 14일에는 100여 명의 천도교인들이 다시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북청 노덕면의 독립 만세 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도들이 주도하였다. 특히 천도교의 조직적 동원에 기반하여 일어난 것이 특징이며, 더욱이 타 지역 천도교인까지 합세시켜 일으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한층 발전된 시위 양상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