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시위는 3월 3일 읍내면에서 일어났다. 천도교 수안교구장 안봉하(安鳳河)는 3월 1일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받아 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2일에는 천도교 시일(일요일) 집회에 모인 천도교인에게 다음날 있을 시위 계획을 알렸다. 그러나 그날 밤 시위 준비 사실이 발각되어 헌병대가 주동자들을 잡아갔다.
3일 다행히 검거를 피한 이영철(李永喆)·홍석정(洪錫禎)·한청일(韓淸一) 등 천도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130여 명이 천도교당 앞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곧이어 각 면에서 모여든 천도교인들이 행진에 합세했다. 시위 군중이 헌병분견소에 몰려가 주동자들의 석방을 요구하자 헌병들이 총격을 가해 9명이 즉사했다.
3월 7일에는 수구면 석달리에서 천도교 전교사 이승필(李承邲)의 주동으로 천도교인 100여 명이 홀동 장날을 이용하여 헌병분견소 앞에서 분견소 철거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9일에도 석달리 헌병분견소에 약 150명의 군중이 몰려가 시위했다.
3월 7일과 10일에는 연암면 은율리에서 경신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3월 10일과 18일에는 천곡면 두대동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수안군의 삼일운동은 천도교회의 주도로 일어났으며, 읍내면, 수구면 석달리, 연암면 은율리, 천곡면 두대동 등 여러 지역에서 지위가 발생했다. 특히 3월 3일 읍내면의 시위는 황해도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치열한 항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