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죽회 ()

근대사
단체
1913년경 평양에서 조직되었던 여성독립운동단체.
이칭
이칭
송죽결사대, 이문회, 유신회, 공주회, 기도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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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3년경 평양에서 조직되었던 여성독립운동단체.
개설

명칭은 절개의 상징인 소나무와 대나무의 합칭이며, ‘송죽결사대’라고도 하였다.

설립목적

독립군의 자금 지원, 망명지사의 가족 돕기, 독립을 위한 회원들의 실력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기능과 역할

송죽회는 평양숭의여학교의 교사 김경희(金敬熙, 敬喜) · 황에스터, 졸업생 안정석(安貞錫) 등 3명이 재학생 중 애국심이 투철한 박현숙(朴賢淑) · 황신덕(黃信德) · 채광덕(蔡光德) · 이마대(李馬大) · 송복신(宋福信) · 이효덕(李孝德) · 김옥석(金玉石) · 최자혜(崔慈惠) · 서매물(徐梅勿) · 최의경(崔義卿) · 이혜경(李惠卿) 등 20명을 선발해 조직하였다.

회원의 입회는 회원 1명의 추천에 의해 전원의 찬성이 있어야 가능하였다. 월회비는 30전이었고, 그밖에 특별회비제도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이들은 조직을 확장하기 위해 창설자 3명 중 김경희는 학교에서, 황에스터는 서울에서, 안정석은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민족정신의 함양과 정신무장을 강화하기 위해 매주 1회씩 기숙사에서 기도회 형식의 비밀집회를 통해 토론회와 역사강좌를 가졌다.

1916년 회원들이 졸업하면서 송죽회 활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이들은 졸업 후 각 지방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재직학교를 중심으로 송죽회의 활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송죽회는 창립회원으로 구성된 모조직(母組織)으로서의 송형제(松兄弟)계열과 창립회원 20명이 각기 20개의 자조직(子組織)을 구성, 확장하는 죽형제(竹兄弟)계열의 이원조직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점조직화했고, 이문회(以文會) · 유신회(維新會) · 공주회(公主會) · 기도동지회(祈禱同志會) 등의 다른 명칭을 사용하였다.

이들은 본부를 평양에 두고 1명의 회장이 전조직을 관장하였다. 지방조직책인 송형제는 매월 정기적으로 평양에 모여 회비납부 · 사업보고 · 계획수립에 대해 토의하였다.

3 · 1운동 이후 임시정부요원으로 활약하다가 1920년에 죽은 초대회장 김경희에 대한 임시정부의 추도사에 의하면, 이 회에서 독립운동자금으로 저축한 금액이 600여 원에 달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이 회가 얼마나 착실하게 운영, 발전해갔는가를 알 수 있다.

이들의 활동은 회원들이 일본 · 미국 등지로 유학을 가면서 국내 뿐만 아니라 국외에까지 확산되었다. 3 · 1운동 당시 지방에서 여성들이 많이 참여한 것은 송죽회의 조직이 크게 작용한데 기인하다.

또한, 3 · 1운동 직후 평양을 중심으로 한 애국부인회의 활동 또한 이 조직이 그 기초가 되었다. 이와 같이 송죽회는 불굴의 애국심을 바탕으로 많은 여성지도자를 배출했으며, 회원들의 철두철미한 기밀유지로 일본경찰의 수사망에도 발각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한국근대여성운동사연구』(박용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한국여성독립운동사』(3·1여성동지회, 1980)
『조국을 찾기까지』(최은희, 탐구당, 1973)
『우리 황신덕선생(黃信德先生)』(중앙여자고등학교,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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