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11월 6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제안(濟安)이다. 아명은 진주(眞珠)였고 호는 추계(秋溪)다. 아버지는 황석청(黃錫淸), 어머니는 평양의 유명한 전도부인 홍유례(洪裕禮), 언니는 황에스터(황애시덕, 황애덕)이다. 어머니가 난산으로 죽기 직전이었는데, 캐나다 여성의료선교사인 로제타 홀(Rosetta Hall)의 진료로 그를 낳았으며, 이후 온 가족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근우회 집행위원, 신가정 기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등으로 활동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여성문제연구회 회장, 추계학원 이사장, 3·1여성동지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83년 11월 22일 사망했다.
1910년 평양 정진소학교, 1915년 평양 숭의여학교를 졸업했다. 재학 중 언니 황애시덕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단체 송죽회(松竹會) 평양지회 책임자로 활동했다. 졸업 후 유치원 보모로 있다가 1918년 12월 일본으로 건너가 1920년 지요다[千代田]고등여학교를 졸업했다. 1920년 여자영학숙(女子英學塾)을 거쳐 1921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사회철학과에서 청강생으로 수학했다. 1922년 도쿄대학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의 도움으로 니혼[日本]여자대학 사회사업학과에 들어가 1926년 3월 졸업했다.
유학 중이던 1920년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도쿄 히비야[日比谷]공원에서 독립만세를 외쳐 구류 7일에 처해졌다. 같은 해 6월부터 도쿄 여자유학생 친목회인 학흥회의 서기를 맡았고 1921년 5월에는 30여 명의 여학생이 도쿄 조선기독청년회관에서 여자기독청년회를 조직했다. 1925년에는 이현경(李賢卿), 박순천(朴順天), 권명범(權明範) 등과 함께 여성사상단체인 삼월회를 조직하고 위원으로 활동했다.
1926년 졸업 후 귀국하여 그해 5월 『시대일보』, 11월 『중외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하였으며, 경성실천여학교(1931년 4월 명성여자실업학원으로 개칭) 교사로 강단에 섰다. 조선여성동우회에 참여했으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총회 및 하령회에서 강연하고 여성동우회를 대표해 청년회와 천도교 제2대 교주 해월탄생기념행사에서 여성과 부인문제에 관해 강연했다. 1927년 1월 직업부인회 조직을 준비하면서 실행위원을 맡았고, 2월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했다. 5월 김활란(金活蘭), 유영준(劉英俊), 이현경, 유각경(兪珏卿), 현신덕(玄信德), 최은희(崔恩喜), 박원희(朴元熙), 정칠성(丁七星) 등과 함께 근우회(槿友會)를 조직해 전형위원 겸 집행위원(교양부 상무)으로 활동했다.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만주 일대 문물을 시찰하고 동포의 생활상을 조사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귀국했다. 12월 근우회가 개회하는 재만동포동정음악대회 준비위원으로 일했다.
1928년 1월 초 「1927년 여성운동의 회고(1)」(『조선일보』1928.1.1.)와 「일 년간 운동의 교훈」(『동아일보』1928.1.1.)을 통해 1년간의 근우회 여성운동을 정리하고 장래를 전망했다. 4월 근우회가 제1회 전국대회를 개최하였는데 대회준비위원·대의원·대의원자격 심사위원·전형위원을 맡았고, 전국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7월 2회 전국대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 겸 중앙상무위원(정치문화부), 근우회관 건축기성회 재경위원으로 뽑혔다. 근우회 활동을 하면서 1929년 경성여자소비조합 창립위원 및 1930년 감사로 여자소비조합운동에 참여했다. 1929년 임봉순(任鳳淳)과 결혼했다.
1934년 여자의학강습소를 재단법인 여자의학전문학교로 만들기 위해 여자의전 발기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또 같은 해 황애시덕, 황인덕 자매와 함께 경영난에 빠진 중앙보육학원을 인수했으나 1년 만인 1935년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손을 뗐다. 1934년 6월부터 가정부인협회 교양부장으로 활동했고, 1935년 12월 직업부인협회 사업부 임원으로 참여했다. 1934년부터 동아일보사에서 운영하는 『신가정』 기자로 일하다가 1937년부터 『동아일보』 정리부 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신가정』 기자로 활동하며 여권문제와 사회문제에 관한 글을 다수 발표했다.
중일전쟁 직후부터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면서 협력을 촉구했다. 1937년 8월 애국금차회 회원으로 금품 1원을 헌납했다. 1938년 6월에는 여성단체 연합으로 열린 시국강연회에서 ‘비상시국과 가정경제’라는 제목으로 강연했고, 7월에는 여성단체 대표로 유각경 등과 함께 용산육군병원을 방문했다.
1940년 10월 의친왕의 아들 이우(李鍝)가 희사한 2만원으로 경성가정여숙(京城家庭女塾)을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했다. 1941년 8월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석했고 9월 조선임전보국단을 조직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해 10월 평의원, 12월 부인대 지도위원을 맡았다. 그해 가정에서도 전쟁에 협력할 것을 촉구하는 「봉공의 정신을 높이라」(『매일신보』1941.7.11.), 「폐품을 재생산하여 국가에 필요하게 쓰자」(『매일신보』1941.9.16.), 「근로의 정신, 신념을 갖고 책임을 다하자」(『매일신보』1941.12.25.)와 같은 글을 실었다. 같은 해 9월 전위여성격려대 순회강사와 12월 매일신보사에서 주최하는 부인시국강연회 연사로 나섰다. 1942년 1월 3일부터 10일까지 ‘전시생활과 부인도덕 좌담회’에 참석했고, 2월에는 ‘군복수리 근로’에 참여했다.
1943년에는 근로정신대 지원을 권유하는 강연을 했고 제자인 경성가정여숙 학생을 여자근로정신대로 차출하여 일본 군수공장에 보냈다. 같은 해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 후생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1월 청주·충주·영동지역 전위여성격려대 연사로 활동했다. 1944년 9월 국민동원총진회의 중앙지도위원을 맡았다. 1945년 1월 경성가정의숙을 중앙여자상과학교로 인가받고 교장에 취임했다.
해방 후 1945년 8월 건국부녀동맹을 조직했고, 1946년 10월 독립촉성애국부인회 정치부장으로 선임되면서 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에 지명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가 그해 10월 평양에서 탈출하였다. 1952년 여성문제연구회 창립 및 회장, 1956년 가정법률상담소 창립 및 이사장, 1958년 대한어머니회 창립 및 이사를 역임했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경성가정여숙의 후신인 중앙여자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며 여성교육에 앞장섰다. 1961년 중앙여자중고등학교 재단인 추계학원의 이사장이 되어 추계유치원에서 추계예술대학교에 이르는 종합학교법인으로 성장시켰다. 1970년 3·1여성동지회 부회장, 1973년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80년 12월 추계학원 이사장직을 사퇴하였다.
1962년 8월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