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출신으로 이명은 정금죽(丁錦竹)이다. 상경 후 남도 기생들이 중심이 된 한남권번(漢南券番)의 기생이 되었다. 1922년 일본 동경(東京)의 영어강습소에서 수학하고, 1923년 귀국한 뒤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다. 10월 대구여자청년회 창립을 주도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924년 5월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여성운동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해 발기인 ·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경북 도 단위 사상단체인 사합동맹(四合同盟) 결성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동경여자기예학교에 입학했고, 사상단체인 삼월회(三月會)에 참여했다. 1926년 삼월회 간부로 『조선일보』에 “진정한 신여성은 불합리한 환경을 모두 거부하고 강렬한 계급의식을 지닌 무산여성”이라는 요지의 글을 실었다.
1927년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결성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이어 1928년 임시전국대회자격심사위원, 1929년 제2회 전국대회준비위원회 의안부(議案部) 책임자와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냈다. 이때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의 계급의식을 고취시키는 강연을 하였고, 일본경찰에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소위 ‘조선공산당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1931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나, 신간회가 해소된 이후에는 외부활동을 중단하고 서울 낙원동에서 가게를 운영했다.
해방 이후인 1945년 12월 좌익계 여성단체인 조선부녀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부위원장,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중앙상임위원 겸 조직부 차장으로 활약하다가 월북했다. 이후 1948년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한국전쟁 이후에는 1955년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1956년 민주여성동맹 부위원장, 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1957년 최고인민회의 제2기대의원을 지냈다. 1958년 반종파투쟁 당시 반혁명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