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물산장려운동 ()

목차
관련 정보
근대사
사건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말까지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경제자립운동.
이칭
약칭
물산장려운동
사건/사회운동
발생 시기
1920년대 초
종결 시기
1930년대 말
관련 국가
식민지 조선|일본
관련 단체
조선물산장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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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조선물산장려운동(朝鮮物産奬勵運動)은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말까지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경제자립운동이다. 이 운동은 3 · 1운동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경제적인 영역에서 민족 역량 개발을 목적으로 하였다. 1920~1930년대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해서 조선물산의 애용을 장려하면서 조선인 기업의 활동을 촉진한 경제자립운동이었다.

목차
정의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말까지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경제자립운동.
배경

1910년대 후반 이후 공장을 설립하고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한 조선인 자본가들은 일제의 경제정책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의 관세 철폐로 인해 타격을 받은 조선인 자본가들은 1920년대 초반부터 조선물산(朝鮮物産)을 장려하고 조선인의 산업을 진흥하자는 목적으로 대중적 경제운동을 일으켰다.

경과 및 결과

물산장려운동이 처음 시작된 곳은 평양이었다. 1920년 7월 발기인 대회를 열었으나 일제 당국과 평양상업회의소의 방해로 설립이 중지되었다. 1922년 5월에 다시 발기인 대회를 개최하고, 같은 해 6월 20일 창립총회를 열었다. 서울에서는 1922년 12월 중순 연희전문학교 학생인 염태진(廉台振) ‧ 박태화(朴泰和) 등 50여 명이 “조선인이 일치하여 조선 물품만 쓰고 수입품은 사용하지 말자.”라고 주장하며 자작회(自作會)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조선물산 장려와 자작자급의 사회적 요구 속에서 1923년 1월 20일 서울 낙원동 협성학교(協成學校) 강당에서 50여 명이 모여 조선물산장려회 발기 총회를 개최하였다. 창립 위원에 이종린(李鍾麟) ‧ 정로식(鄭魯湜) ‧ 김윤수(金潤秀) ‧ 박동완(朴東完) ‧ 김철수(金喆壽) ‧ 한인봉(韓仁鳳) ‧ 고용환(高龍煥) ‧ 김동혁(金東赫) 등을 선임하였다. 이들은 민족운동가 · 교육자 · 종교인 · 기업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같은 달 23일 개최한 창립총회에서 회의 조직과 활동 방안을 논의하고 이사 20명을 선출하였다.

같은 날 결정된 사항은 첫째, 우선 의복은 남자는 두루마기, 여자는 치마를 무명을 염색하여 음력 정월 1일부터 즉시 시행할 것, 둘째, 음식은 식염 · 사탕 · 과실 · 청량음료 등을 제외하고는 전부 토산(土産)을 사용할 것, 셋째, 일용품은 가급적 토산을 사용하고 부득이하게 외국품을 사용하더라도 가급적 절약할 것 등을 정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 민족운동 세력의 분화 과정에서 물산장려운동을 둘러싼 여러 논쟁이 일어났다. 민족주의 계열과 조선인 자본가들은 일제 당국과 일본인 자본가에 대해서는 ‘조선인 물산장려론’으로, 물산장려운동을 반대하는 사회주의 계열에 대해서는 ‘생산력 증대론’으로 대응하였다.

‘조선인 물산장려론’은 일본인 자본에 대항한 조선인 자본이란 민족적 주체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조선물산의 장려가 자본가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비판하였는데, ‘생산력 증대론’은 조선물산이 많이 생산되면 민족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입장이었다.

조선물산장려회의 의사결정 기구는 지방대의원대회 · 총회 · 이사회로 구성되었다. 지방대의원대회는 본회와 지회 간의 활동 방안을 심의 · 결정하는 기구였고, 총회는 1년에 한 번 개최되어 주요 사업과 활동 방침을 논의 · 결정하였다. 이사회는 사업 전반을 집행하였는데, 산하에 경리부 · 조사부 · 선전부를 두었다.

조선물산장려회는 사업의 확대를 위해 주요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조선물산장려회 지회규정」에 따르면, ‘거주하는 회원인 30인 이상’일 경우 지회를 설립할 수 있었다. 1922년 12월 경상남도 진주의 자작회 발기회를 시작으로 북부 함경도까지 전국적으로 지회가 설립되었다.

지역 물산장려운동의 주도 세력은 대부분 지역 청년 단체 그리고 기독교 청년 단체와 교회가 중심이 되었다. 지방 지회들은 조선물산의 애용을 장려하고, 조선물산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한 소비조합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조선물산장려회의 대표적인 사업은 선전 활동이었다. 선전의 방법은 선전 행렬 · 강연회 · 가정선전반 조직 등 다양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활동은 음력 정월 1일 회원들이 모여 서울 시내에서 실행한 선전 행렬이었다. 1923년 2월 3일에는 서울 천도교당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설태희(薛泰熙)의 개회사에 이어 이종린(李鍾麟)의 사회로 개최되었는데, 연사에는 최순탁(崔淳鐸) · 이돈화(李敦化) · 오화영(吳華英) 등이었다.

1929년 12월 3일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동양염직의 이욱하(李郁夏)가 「생산업자와 조선물산장려」, 경성방직의 정세택(鄭世澤)이 「방직사업의 성쇠와 생활의 소장(消長)」, 경제학 박사 이극로가 「자작자급의 본의(本義)」, 물산장려회 이사 정세권이 「소비조합의 필요를 감(感)함」 등을 강연하였다.

조선물산장려회는 조선물산 장려를 실천하는 방안으로 1923년 2월에 소비조합 설립을 결의하고 설립위원으로는 이순탁(李順鐸) · 김철수(金喆壽) · 나경석(羅景錫)을 선출하였다. 또한 생산 장려를 직접 실천하기 위해 수공부를 두었다. 그리고 조선물산 진열관의 설치와 조선물산 품평회 개최, 계몽을 위한 기관지 발행에 착수하였다.

조선물산장려회는 1923년 11월에 『산업계(産業界)』를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1924년 3월 제5호까지 발행하고 종간되었다. 이후 1927년 4월에 『자활(自活)』로 다시 간행되어 12호까지 발행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다시 『조선물산장려회보』 · 『장산(奬産)』 · 『실생활(實生活)』 등으로 개칭되면서 1932년까지 간행되었다.

조선물산장려회는 1931~1932년에 이르러 이사진의 3분의 2가 바뀌는 등 대대적인 개편이 있었다. 국내외 정세 변화 때문이었다. 1929년에 발발하였던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노동자의 임금이 인하되고, 노동 조건이 악화되었고, 이에 대항한 노동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으로 인해 피폐해진 농촌에서 소작쟁의가 확장되었다. 또한 신간회에 주력하였던 민족주의 계열이 물산장려운동에 다시 관심을 가지면서 이사진 개편과 운영 방법의 변화를 모색하였다.

1930년대 조선물산장려회를 이끈 인물들은 정세권 등의 상공업자와 김용관 등의 기술자 출신이 많았다. 정세권은 건양사(建陽社)라는 건축 관련 회사 전무로 1929년 10월부터 약 3년간 물산장려회의 각종 사업에 필요한 재정을 담당하였다. 김용관은 경성공업전문학교 졸업생으로 일본 유학을 한 후 발명학회의 설립을 주도하고 이사로 활동하였다.

일제는 1920~1930년대 조선인의 경제자립운동을 계속해서 견제하였다. 일제의 통제경제정책과 황민화정책이 강화되면서 마침내 1937년 2월 조선물산장려회는 총독부의 명령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단행본

오미일, 『경제운동』(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논문

방기중, 「1920‧30년대 조선물산장려회 연구」(『국사관논총』 67, 1996)
윤해동, 「일제하 물산장려운동의 배경과 그 이념」(『한국사론』 27,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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