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노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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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창극사
조선창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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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조선물산장려회 경리부원, 민립대학기성회 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 등을 역임한 관료 ·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9년(고종 36)
사망 연도
1965년
출생지
전라북도 김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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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조선물산장려회 경리부원, 민립대학기성회 집행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북한에서,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 등을 역임한 관료 · 독립운동가.
내용

전라북도 김제군(현,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출신으로, 1910년 김제의 영명학교를 졸업한 뒤 조선중앙기독청년회학관에 입학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12년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정치경제과에 입학했으나, 후일 중퇴하였다.

1915년 장덕수(張德秀) · 김철수(金錣洙) 등과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1916년 중국 · 대만의 운동가들과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결성했다. 1918년 조선인유학생학우회 평의원이 되었는데, 이즈음 동경경시청의 요시찰인물 갑호로 지정되었다. 1919년 1월 미국, 중국 간도(間島) 및 상해, 노령의 독립운동가들과 연락하기 위해 이광수(李光洙)를 북경에 파견했고,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점차 사회주의운동에 관심을 보여 1920년 서울에서 사회혁명당에 참여하였다. 1921년 5월 중국 상해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서 국내 간부에 선임되었으며, 1922년 조선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장이 되고,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 창립에 참여하여 전형위원이 되었다. 한편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 경리부원, 민립대학기성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폭넓게 협력,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판소리에 관심을 쏟아 『조선창극사』를 썼다. 해방 이후인 1946년 2월 여운형(呂運亨) · 허헌(許憲) · 박헌영(朴憲永) · 김원봉(金元鳳) 등이 구축한 민주주의민족전선의 부의장 및 상임위원, 7월 남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11월 남조선노동당 결성대회에 의장단의 일원으로 참석했으며, 12월 중앙상무위원 및 협조부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월북한 이후, 북한에서는 1948년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1949년 남북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을 통합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을 지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1956년 노동당 중앙검사위원, 1957년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 및 상임위원, 1958년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1961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65년 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창비사, 1996)
『압록강변의 겨울 : 납북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이태호 저·신경완 증언, 1991)
『남로당연구』Ⅰ (김남식, 동베개, 1984)
『한국공산주의운동사(韓國共産主義運動史)』제2권 (김준엽·김창순, 고려대학교출판부,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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