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자동맹회는 1922년 3월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하였던 사상단체이다.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와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가 통합하여 설립된 단체이다. 1922년 12월 22일 서울 천도교당에서 개최한 강연회에는 1,500여 명의 청중이 참여하였고, 참석자 가운데 양화공(洋靴工)만도 200여 명에 달하였다. 1925년 4월 사회주의단체인 화요회(火曜會) · 북풍회(北風會) · 조선노동당과 함께 ‘4단체 합동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1926년 4월 이들 세 단체와 함께 정우회(正友會)를 발족시키고 발전적으로 해산되었다.
1919년 3 · 1운동 이후 활발하게 일어난 대중운동의 일환으로 전국 각지에서 많은 청년 ‧ 사상 단체들이 생겨났다. 국외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고 국내에 조직을 결성한 상해파(上海派)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과 이르쿠츠파 고려공산당에 소속되지 않은 사회주의 비밀조직이 결성되었다. 그 가운데 1921년 5월 서울에서 재결성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1925년 조직되는 조선공산당과는 다른 단체]'과 1921년 10월 도쿄[東京]에서 결성되었다가 서울로 옮긴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서울파]’이 존재하였다.
조선공산당은 1922년 1월 19일에 합법적 외곽 사상단체로 무산자동지회를, 사회혁명당[서울파]은 1922년 2월에 합법적 외곽 사상단체로 신인동맹회를 조직하였다. 1922년 3월에 무산자동지회와 신인동맹회가 통합하여 무산자동맹회가 설립되었다.
1922년 12월 22일 서울 천도교당에서 "노동자는 단결하여 ‘이리의 영혼’을 가진 자본가에 대항하라."는 박일병(朴一秉)의 「시랑(豺狼)의 혼(魂)」, 구두 만드는 직공의 가련한 상태에 관한 김한(金翰)의 「기한(飢寒)에 박(迫)한 양화직공(洋靴職工)」이란 주제의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 강연회에는 1,500여 명의 청중이 참여하였고, 참석자 가운데 양화공만도 200여 명에 달하였다.
1925년 4월 사회주의단체인 화요회 · 북풍회 · 조선노동당과 함께 ‘4단체 합동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1926년 4월 이들 세 단체와 함께 정우회(正友會)를 발족시키고 발전적으로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