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金翰)은 1888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이명은 김제관(金霽觀), 김상엽(金相燁). 김자홍(金子弘)이다.
대한제국에서 탁지부 주사 등을 역임하였다. 1905년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学〕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다. 1912년 만주로 망명한 후 상하이, 텐진〔天津〕, 펑취안〔鳳泉〕, 지린〔吉林〕, 하얼빈 등지에서 반일운동에 참가하였다. 1916년 국내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광복단의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12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사법부 비서국장이 되었고, 같은 해 7월 임시정부 산하 임시사료편찬소 위원이 되었다.
임시정부와 뜻을 달리한 김한은 귀국하여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고 실천하는 한편, 의혈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5월 서울에서 원우관(元友觀) 등과 함께 최초의 공산주의 단체 가운데 하나인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고, 다음 해 5월 ‘조선공산당’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 무렵 천도교 혁신운동에도 관여하였다. 1920년 6월 조선청년회연합회 기성회 사교부원이 되었다.
1921년 1월에는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2년 1월 ‘조선공산당’의 합법 단체인 무산자동지회를 결성하고 상무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2월 김윤식(金允植) 사회장 반대운동에 참여하였으며, 2월 2일에는 원우관 등과 함께 재동경신인동맹(在東京新人同盟) 명의로 "민중의 격(檄): 소위 김윤식 사회장이란 유령배(幽靈輩)의 참칭(僭稱) 사회장을 매장하라"라는 글을 발표하였고, 다음 날에는 『조선일보』에 "고 김윤식 씨 사회장 반대에 즈음하여 이 글을 일반 민중에게 보낸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압수당하였다.
1922년 3월 사상단체인 무산자동맹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차 정기총회에서 ‘사기공산당사건(詐欺共産黨事件)' 관련자를 제명할 것을 요구하였다가 거부되자 조선청년회연합회를 탈퇴하였다. 이무렵 공산주의 단체 통일 운동에 참가하여 그 결과로 결성된 ‘중립당’의 위원이 되었다. 9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0월 조선인 출가(出稼)노동자조사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12월에는 경성양화직공 파업을 지원하였다.
1923년 1월 김상옥(金相玉)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 형을 선고받고 1927년 4월 출옥하였다. 1928년 말 고려공산청년회 후계 간부를 조직하여 당 재건을 시도하였다. 1928년 10월 유림단(儒林團) 사건에 관련되어 다시 체포당하였다. 1929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대 초에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생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9년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 겸 혁명자후원회(MORP, 모플)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6월 신간회 복대표(複代表)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 2월 소비에트 러시아로 가서 활동하였으나, 스탈린의 숙청을 피하지 못하고 검거되어 1938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