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1운동 후 전국에는 각종 청년 단체가 설립되었고, 전국적으로 청년운동 단체를 통합하는 연합회 결성이 전망되었다. 이를 대비해 1921년 1월 김사국(金思國), 김한(金翰), 이득년(李得䄵), 장덕수(張德秀) 등이 주도하여 서울청년회를 결성하였다. 창립 당시 주요 간부는 이사장에 이득년, 이사에 김명식(金明植) · 김사국 · 김한 · 오상근(吳祥根) · 윤자영(尹滋暎) · 장덕수 등이었다.
합법적 청년 · 사상 단체로 전국 청년단체의 통합을 표방하였으며, 그 내부에는 사회주의자들의 비밀결사가 존재하였다. 1922년 상반기에 ‘ 김윤식(金允植) 사회장(社會葬) 사건’, ‘사기(詐欺) 공산당(共産黨) 사건’ 등을 통해 조직 내부에서는 장덕수 중심의 상해파 고려공산당 국내 세력과 김사국 · 김한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자 사이에 정치적 입장과 노선의 차이가 생겨났다.
김사국 등은 청년 · 사상 운동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다. 이들은 ‘김윤식 사회장 장의위원회’에 참여한 오상근과 장덕수가 『 동아일보』 계열과 제휴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소비에트 러시아의 자금을 상해파 국내 세력인 오상근 · 장덕수 · 최팔용(崔八鏞) 등이 남용했다는 혐의를 제기하였다.
1922년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제3회 정기총회에서 서울청년회의 김사국, 김한 등은 이들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였다. 이 사안이 부결되자 서울청년회와 이에 동조하는 18개 청년단체가 탈퇴하였다.
1922년 6월 서울청년회에서 김명식, 오상근, 이봉수(李鳳洙), 장덕수, 최팔용 등이 제명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조직체계와 집행부를 개편해서 노농 · 사상 · 청년 단체 결성에 주력하였다. 1922년 10월 서울청년회 내부에 비밀리에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에는 김사국, 김영만(金榮萬), 이영(李英), 장채극(張彩極) 등이 참여하였다. 13개 도의 책임자를 선정해서 전국 단위의 당 조직을 세우고자 하였다.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은 1923년 2월 고려공산동맹을 비밀리에 창립하고, 김사국 · 김영만 등 17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하였다. 창립대회에서 코민테른(Comintern)과의 상설적인 연락 기관의 설치와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으로 승인 받을 것을 방략으로 결정하였다. 강령을 “역사적 진화의 필연적인 신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여 돌진한다. 또 계급적 자각과 단결로써 무산대중 해방운동의 전위임을 기한다.”라고 정하였다.
1923년 3월에 경성(서울)에서 94개 단체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전조선청년당대회(全朝鮮靑年黨大會)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전 조선의 단체 연합을 추진해서 19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등 청년운동에 대한 영향력이 컸다.
이후 화요파와 경쟁하면서 국내에서 조선공산당 건설을 지속하다가 1929년 8월 31일에 '조선 청년운동'의 선구라고 평가받던 이 단체는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