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청년연합회는 1920년 서울에서 조직된 청년운동단체의 연합기관이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각지에서 설립된 청년회를 항일민족운동의 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결성식을 거행하고 84개 단체의 대표 124명이 참석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청년에 대한 계몽적 입장에서 『아성(我聲)』을 발행하여 민주주의자·사회주의자들의 글을 게재하였다. 김윤식의 사회장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고, 모스크바 선전자금 수수로 야기된 사기공산단 사건으로 서울청년회가 탈퇴하였다. 1924년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어 해산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을 계기로 1919년 10월부터 1920년말까지 전국에서 985개의 각종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 가운데 종교유사단체가 가장 많았고, 다음이 청년단체였다. 이들 청년회는 연설과 강연을 전개해 사회의 깊은 잠을 깨우기에 힘쓰고, 자신들의 수양에도 힘쓰는 등 계몽운동과 사회개혁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러나 분산된 청년단체로는 모든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가 없어 규합이 요청되었다.
이때 동아일보사가 청년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들 청년단체를 하나로 묶어 연합체로 만드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20년 5월 26일 주간 장덕수(張德秀)가 집필한 사설을 시작으로 청년회연합회의 설치를 제창하기 시작하였다. 각 지방에 창립된 청년회를 대동단결시켜 항일민족운동의 저력으로 육성하려는 취지는 크게 호응을 얻었다. 1920년 6월 서울에서 유지 50여 명이 모여 청년단체의 연합을 위해 우선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朝鮮靑年會聯合期成會)를 발기하였다.
위원장에 오상근(吳祥根), 서무부에 이일(李一) · 이시완(李時玩) · 권영락(權永洛) · 한기악(韓基岳) · 이현(李鉉, 李玹) 李玹), 경리부에 안준(安浚) · 김병석(金炳奭) · 원정룡(元貞龍), 사교부에 장덕수(張德秀) · 장기욱(張基郁) · 김한(金翰), 지방부에 장도빈(張道斌) · 이영(李英) · 박희창(朴喜昌) · 김명식(金明植) · 안확(安廓) · 윤주형(尹柱衡) · 유장호(柳章浩) · 박일병(朴一秉) · 이병조(李秉祚) · 윤자영(尹滋瑛) 등으로 조직되었다.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는 발족된 지 반 년 만에 가입신청 단체가 600여 개 청년회에 달하였다.
1920년 12월 1일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회연합회의 결성식이 거행되었다. 먼저 정 · 부대표 115명이 참가한 가운데 발기총회와 창립총회를 개최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12월 2일 116개 회원 단체 가운데 84개 단체의 정 · 부대표 124명이 참가해 창립총회를 열어, 헌장을 통과시키고 집행위원 및 의사부(議事部) 선거를 치렀다.
이때 선출된 집행위원장은 오상근, 집행위원은 서무상무위원 윤자영, 재무상무위원 이영, 교무상무위원 안확 등 15명, 의사장은 고용환(高龍煥), 의사에는 이인선(李仁善) · 주기철(朱基徹) 등 29명이었다. 1921년 4월 제2회 정기총회가 개최되었다. 집행위원장에는 오상근이 유임되었고, 집행위원에는 윤자영 등 14명이, 의사장에는 유세면(劉世冕)이, 의원에는 여병섭(呂柄燮) 등 28명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1922년 1월 김윤식(金允植)의 사회장(社會葬) 문제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났다. 당시 김윤식 사회장 문제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간에 큰 갈등의 원인을 제공했다.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김윤식을 봉건적 유물에 불과하다고 보아 사회장을 반대했고, 민족주의 진영 일부에서는 사회장을 고집하였다. 이러한 투쟁의 일부에서는 향후 민족 ·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갈등 및 사회주의 진영 내 ‘사회혁명당’ 세력과 서울청년회 세력 간의 갈등도 작용하였다. 간부인 오상근 · 장덕수 등은 사회장위원회에 관계했고, 김사국(金思國) · 김한 등 서울청년회출신 간부들은 사회장을 반대하였다.
같은 해 3월 제3회 정기대회가 개최되어 집행위원장에 정노식(鄭魯湜), 상무위원에 김철수(金喆壽) 등 3명이, 집행위원에는 유세면 등 16명이 선출되었다. 그런데 이때 김사국 · 김한 등이 모스크바 선전자금 수수로 야기된 ‘사기공산당사건’ 관련자의 제명을 요구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서울청년회는 18개 동조단체와 함께 탈퇴하였다. 이러한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1923년 4월 제4회 정기대회에서는 현재의 노선을 지지하는 가맹회원과 같은 해 3월 서울청년회가 주도한 전조선청년당대회(全朝鮮靑年黨大會)의 결의를 지지하는 가맹회원 간에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한편, 조선청년연합회는 서울청년회가 전국의 청년단체를 하나로 묶는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의 조직을 추진해 나가자 당시 청년운동의 대세에 따라 여기에 합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청년총동맹발기준비위원회에 대표를 파견했고, 19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의 결성과 함께 해산하였다.
조선청년연합회의 창립경위를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선 1920년 6월 결성된 조선청년연합회기성회가 발표한 취지와 조직방법 · 강령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취지는 시대의 진운(進運)에 따라 한창 뻗어나는 우리 청년단체를 연합체로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단결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같은 정신과 의식으로 상부상조하며 협력하자고 하였다.
조직방법 3개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인의 각 청년단체를 단결시켜 일대 연합단체를 조직한다. 둘째, 연합단체는 중앙연합기관으로 존재할 것이며, 각지의 청년단체는 각각 독립된 청년단체로 존재하면서 연합단체의 일원이 된다. 셋째, 각 청년단체가 가입할 때는 본회 위원회의 사정(査定)을 경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령은, 우리들은 세계 개조의 기운에 순응해 각자가 지닌 천부한 생명을 창달하며 민족의 고유한 생영(生榮)을 발휘하기 위한다고 전제하고, 사회를 혁신할 것, 지식을 널리 구할 것, 건전한 사상으로 단결할 것, 덕의(德義)를 존중할 것, 건강을 증진할 것, 산업을 진흥할 것, 세계문화에 공헌할 것 등 일곱 가지를 내세웠다.
조선청년회연합회는 1921년 3월부터 10월까지 기관지 『아성(我聲)』을 발행하여 청년에 대한 계몽적 입장에서 민주주의자 · 사회주의자들의 글을 게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