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산운(汕耘). 평안남도 중화 출신. 봉구(鳳九)의 둘째아들이다. 할아버지 제국(濟國)의 훈도로 5세에 사서삼경을 통독하여 신동으로 이름이 났다. 1902년 대한제국의 학부가 관장하던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에 평양감사의 천거로 입학, 1906년 졸업하였다.
한성사범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 박은식(朴殷植)의 소개로 1908년 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들어갔다. 21세에 논설위원이 되어, 8세 위이며 역시 신동으로 알려진 신채호(申采浩) 및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논진(필진)으로 일하였다.
입사 몇 개월 후 신병을 앓던 신채호의 후임으로 논설주필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아, 당시 친일 내각과 친일 단체인 일진회(一進會)와 맞서 투쟁을 벌였으며, 한편으로 안창호(安昌浩)의 신민회(新民會) 비밀회원으로 가담하여 국권회복운동의 선봉에 섰다.
1910년 일제강점으로 신문사가 문을 닫을 때까지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다니면서(4회 졸업) 국사연구에도 몰두하였다.
1910∼1912년 서울의 오성학교(五星學校) 학감으로 있다가, 1913년 노령(露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가까운 신한촌(新韓村)에서 다시 신채호를 만나고, 최재형(崔在亨)·홍범도(洪範圖)·이동휘(李東輝)·이상설(李相卨) 등 독립투사들과 교류하며, 보성전문학교 교수이던 이종호(李鍾浩)의 『근업신문(勤業新聞)』에서 논설을 썼다.
1916∼1918년 병고의 몸으로 귀국하여 평안북도 영변의 서운사(棲雲寺)에서 요양한 뒤 처음으로 민족혼을 일깨우는 『국사』를 발간하였고, 이를 계기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조만식(曺晩植) 교장의 초청을 받아 약 1년간 교사생활을 하였다.
1919년『동아일보』의 발간을 출원하여 허가를 받았으나 운영을 양도하고, 이어 한성도서주식회사를 허가내어 1926년까지 잡지 『서울』·『학생계』·『조선지광(朝鮮之光)』을 발간하였다.
한편으로는 출판사 고려관(高麗館)을 설립하고 『조선사요령(朝鮮史要領)』·『조선위인전(朝鮮偉人傳)』·『조선역사록(朝鮮歷史錄)』 등 많은 책자를 편찬하였다.
1927∼1945년 고적답사를 통한 역사연구에 전념하였으며, 일제 말에는 총독부의 끈질긴 중추원참의 제의를 거부하고 심산에 은둔하였다. 1928년 발간한 『조선역사대전(朝鮮歷史大全)』은 식민사가들에게 경종을 울렸고, 『대한역사(大韓歷史)』를 통한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의 반론은 유명하다.
광복 직후 월남하여 9월 19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동덕초등학교 뒷자리의 방 3칸에서 『민중일보(民衆日報)』를 창간, 공산언론과 대항하였으며, 같은 해 조선신문주간회(朝鮮新聞主幹會)를 조직해 대표가 되었다. 1949년 『민중일보』가 화재를 만나 재건이 어렵게 되자, 윤보선(尹潽善)에게 판권을 무상으로 양도하였다.
그동안 언론활동과 병행하여 1947년한국대학(韓國大學)을 설립하였고, 1948년단국대학(檀國大學)을 설립하여 초대 학장을 지내고 1949년 육군사관학교 국사학 교수로 봉직하였다. 노후에는 서울시사편찬위원과 고등고시위원을 지냈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