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심강(心崗). 전라남도 담양 출신. 아버지 광준(光駿)과 어머니 영일 정씨(迎日鄭氏)의 맏아들이다. 김숙배(金淑培)와 혼인하여 2남 4녀를 두었다. 5세 때 할아버지 정주(鼎柱)가 세운 창평학교(昌平學校)에 들어갔고, 1912∼1916년 사이 집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7∼1921년 사이 서울에서 중앙학교(中央學校)를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아자부중학교(東京麻布中學校)와 야마가타고등학교(山形高等學校)를 거쳐, 1927∼1931년경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1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학예부기자·경제부기자, 1933년 경제부장, 1937년 편집국차장, 1938년 편집국장 등으로 순조로운 승진을 하였으나, 1940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동아일보≫ 폐간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에만 종사하였다.
광복으로 ≪동아일보≫가 1945년 12월 복간되면서 편집국장으로 복귀, 1946년 2월 주필 겸 편집국장이 된 뒤, 1961년 부사장 겸 주필이 되기까지 편집국장을 8번, 주필을 10번이나 역임하였다.
그 동안 1947년 8월 조선신문기자협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된 외에는 신문제작의 외길을 걸으며 ‘동아필정(東亞筆政)’의 결정자로 일하였다.
그 뒤 외부활동을 많이 전개하여, 1961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장, 국제신문협회(IPI) 회원이 되고, 1962년 사단법인 한국신문회관 창설과 동시에 이사장이 되었다. 1965년 국제신문협회 한국위원장이 되었으며 동아일보사 사장에 올랐다.
1966년 한국신문연구소 이사장, 인촌기념사업회(仁村紀念事業會) 이사장직을 맡고,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을 거쳐, 1971년 동아일보사 회장이 되었다.
이 해부터 1974년까지 회장으로서 열한번째 주필직을 다시 겸임함으로써 제4공화국에 대한 ≪동아일보≫의 방벽 구실을 자청하였으며, 그러던 중에도 1973년성곡학술문화재단(省谷學術文化財團) 이사장직과 1974년운정장학재단(雲庭奬學財團) 이사장직을 역임하였다.
1975년 동아일보사 명예회장이 되어 일선 언론계에서 물러섰다. 성격은 부하직원에게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힐책을 않는 ‘무구인(無口人)’이었으며, 자기자랑을 절대 하지 않는 사람으로 저서도 남기지 않았다. 1962년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