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강서 출신. 1919년 3·1운동 때 강서군 소재 반석교회(盤石敎會)의 신도로서 금제면(金祭面) 원장(院場)과 그곳에서 서쪽으로 10km 가량 떨어진 모락장(沙川市場)에서 전개된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 지역의 만세시위는 3월 1일에 있은 평양의 시위에 참가했던 반석교회 장로 조진탁(曺振鐸)이 독립선언서 여러 장을 가지고 와서 교회지도자들에게 알림으로써 비롯되었다. 여기에서 빚어진 정황은 경기도 수원의 제암리(堤巖里)사건과 함께 3·1운동사 상 대표적인 유혈참극의 하나였다.
금제면 원장에서의 시위는 3월 4일에 있었다. 이 곳의 시위를 마친 군중들은 이틀 전인 3월 2일 모락장에서 시위를 준비하다가 일본경찰에 예비 검속된 동지들을 구출하자고 결의하고 모락장으로 진군하였다.
이들은 대형 태극기를 선두로 하여 나팔수·청년·부녀자·노인 등의 순서로 열을 지어, 수백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시위행렬이 모락장에 도착하자, 일본군경이 야만적으로 발포해 현경묵(玄景默) 등 13명이 그 자리에서 순국하는 참극이 빚어졌다. 이에 군중들이 투석으로 맞서는 과정에서 격앙된 시위군중이 헌병주재소장인 사토[佐藤]상등병과 헌병보조원 3명을 타살하였다.
이로 인해 원장교회·산수리(山水里)교회·반석교회 교인을 중심으로 49명이 구속되었는데, 이현도 그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1919년 8월 13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살인·방화·소요·보안법위반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항고하였다.
그러나 11월 4일 평양복심법원, 12월 6일 고등법원에서 모두 기각되어 6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5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