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철원 출신으로, 1919년 8월 11일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 도피안사(到彼岸寺)에서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이 군단조직을 만드는 데 참가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와 연계되어 김상덕(金相德)이 주동하여 조직한 애국단에서 학무과장을 맡았다. 이어서 8월 20일에는 강원도 도단부를 설치하는 데도 참가하였다.
같은 해 10월 애국단은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정부수립을 기념하는 제2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10월 10일 철원 사요리(四要里) 우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될 때, 오세덕(吳世德)과 더불어 군중들에게 시위에 참여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태극기 게양과 인쇄물 배포 등을 주도하였다.
이 시위 직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가하였고, 1920년 1월 임시의정원의원(강원도 대표)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4월 17일부터 베이징에서 열린 군사통일회의에 하와이독립단 대표자격으로 참가, 국민대표회주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상해로 가서 국민대표회의를 준비하다 1923년 1월부터 5월 말까지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북경 지역 대표로 참석, 창조파에 가담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큰 결실 없이 끝났다.
1926년 안창호(安昌浩)와 원세훈(元世勳) 사이에 제 독립단체들의 역량을 결집,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중국 본토에서 민족협동전선을 결성하기 위한 유일당운동이 그것이다. 첫결실로 1926년 10월 16일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가 결성되었는데, 이에 주도적으로 참가, 장건상(張建相) 등 6명과 더불어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어서 상해·남경·광동·무한 등에서도 유일독립당촉성회가 속속 결성되었고, 1927년 11월 9일에는 이들 다섯 지역의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여기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여 15인의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