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은 김상배(金相倍)·김상배(金尙培)·김길동(金吉同)·정춘산(鄭春山)·한중해(韓仲海). 함경북도 경흥 출신.
김춘배의 독립운동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진다. 첫 시기는 1927년 정의부(正義府)에서 활동하던 때로 1934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다음 시기는 1934년의 의열투쟁인데, 이로 인해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김춘배는 1927년 2월 중국 길림성 돈화현(敦化縣)에서 정의부에 가맹하고, 6차례에 걸쳐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천보산분서(天寶山分署)에 붙잡혀 청진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청진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8년 7월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다시 붙잡혀 징역 1년 10월이 가중되어, 투옥된 지 8년 만인 1934년 5월 14일 출옥하였다.
그 해 10월 2일 밤 11시부터 다음 날인 3일 새벽 2시 사이에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면 경찰주재소의 무기고를 단신으로 파괴하고, 권총 2정(26식)과 실탄 100발, 기관총(38식) 5정과 실탄 600발, 단식 보병총 1정 등을 빼앗았다. 18일 동안이나 포위망을 피하는 과정에서 신출귀몰한 변장술을 구사하고, 대담한 결투를 벌였으며, 특히 그 과정에서 일인 순사부장을 비롯한 경관 2명에게 총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진발 서울행 열차로 남하하다 10월 20일 신창역에서 신북청역으로 가던 도중 붙잡혔다. 1934년 11월 2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주거침입과 절도, 강도 및 살인미수, 공무집행방해죄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경성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했다가 취하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