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은 박치화(朴致華). 평안북도 의주 출신.
주로 남만주일대에서 활약한 조선혁명당과 그 당군(黨軍)인 조선혁명군에서 활약하였다.
1931년 9월 18일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이 10월에 들어 조선혁명당과 군을 공격하자 조선혁명당의 조직은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최악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혁명당은 12월 17일 중국 신빈현(新賓縣) 하북(河北)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조직이 새롭게 개편되었는데, 이때 이호원(李浩源) · 양하산(梁河山) · 김보안(金輔安) · 김관웅(金寬雄) · 고이허(高而虛) · 김학규(金學奎) 등 15명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인 1932년 1월 상순에는 조선혁명군사령부 부관장(副官長, 또는 機要秘書)이 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월 19일 아침, 회의장이 중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이호원(조선혁명당중앙집행위 원장) · 김관웅(조선혁명군사령) · 장세용(張世湧, 부사령) · 이종건(李鍾建, 국민부공안국장) · 이규성(李奎星, 경위대대장) 등 요인 10여 명과 함께 체포당했는데, 이를 신빈사건(新賓事件)이라 한다.
체포 뒤 퉁화[通化] 주재 일본영사관으로 끌려가서 악형을 받은 끝에 순국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