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명은 건웅(建雄)·김정우(金政友). 평안북도 의주 출신.
1926년 10월 중국 광둥[廣東]에 있던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보병과를 제4기로 졸업하고 중국군에 들어가 복무하였다.
그 뒤 1928년 9월 상해(上海)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에 가입해 활동하였으며, 황푸군관학교 동기생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이후 한일래(韓一來)와 함께 의열단 대표로서, 1932년 10월 상해에서 열린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을 위한 협의회에 참석하였다. 그 자리에서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혁명당·한국광복동지회 대표와 함께 합작체를 발기, 각 단체연합준비위원 5인 중 1인으로 추대되었다.
이어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과 중국측 여러 항일단체를 연합시켜 중한민중대동맹을 결성하는 데 참여하고, 조직선전부장을 맡았다.
1934년 김원봉이 주축이 되어 만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제1기 교관으로 정치부장을 맡고, 1기생 26명을 배출하였다. 1기생 졸업 직후 김원봉과 의견 충돌을 빚어 의열단을 이탈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1935년 7월 5일 김원봉이 창당한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다.
1936년 김성숙(金星淑) 등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을 이탈,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하였다. 1942년 임시정부 선전위원회 선전위원, 의정원 의원, 약헌수정위원, 군무부 비서, 한중문화협회 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1944년 6월에는 5차 임시약헌개정에서 선전부가 신설되자 부주임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1946년 8월부터 사회민주당에 참여하면서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으로 좌우합작운동에 매진하였다. 그 해 12월에 문을 연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에 관선으로 입법의원이 되고, 산업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명예연구사 칭호를 받고, 『고려사』·『리조실록』·『팔만대장경』 등의 고전번역을 담당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