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을 겪고 난 1920년 초의 민족운동 선상에는 민족개량주의와 비타협적 민족주의, 그리고 새로운 시대사조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먼저 1920년 12월에는 장덕수(張德秀)가 중심이 되어 전국 113개 청년단체를 규합,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가 조직되고, 이어서 1921년 1월 장덕수·김명식(金明植)·오상근(吳祥根) 등에 의해 서울청년회가 창립되었다.
한편 이에 대항하여 김한(金翰)·신백우(申伯雨)·박일병(朴一秉) 등의 사회주의자는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를 결성하였다.
서울청년회의 실권을 장악한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들을 조선청년회연합회에서 탈퇴시키고, 종래의 민족주의 노선에서 사회주의 노선으로의 방향 전환을 꾀하였다.
1923년 3월 24일부터 30일까지 서울에서 회의 장소를 옮겨가며 서울청년회를 비롯한 94개 단체를 참가시켜 전조선청년당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전국의 청년운동은 좌우 양대 진영으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전조선청년당대회를 준비하고 이에 참가한 중요 청년단체는 서울청년회를 비롯해 천도교유신회·불교청년회·불교여자청년회·대종교중앙청년회·포항청년회·진영청년회 등이었다.
이들은 교육·경제·종교·민족·노동·부인·청년 문제 등에 대한 안건을 토의하고 당면의 사활 문제를 상담, 해결하여 구체적 실현을 촉진하였다. 동시에 대중운동으로서의 새 청년운동의 방향을 사회주의 운동노선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 대회는 처음부터 일제 당국으로부터 항일독립운동으로 주목되어 탄압을 받았고, 1923년 3월 29일 일제 당국이 집회 금지령을 내림으로써 막을 내렸다. 일제 당국이 처음에 이 대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준 것은 항일독립운동의 내막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