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만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김영만 전후면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김영만 전후면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선전부 간부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김추봉(金秋峯), 김창기(金昌基)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1년(고종 28)
사망 연도
1934년
출생지
충청남도 논산
관련 사건
낙양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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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 선전부 간부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독립운동가.
개설

일명 김추봉(金秋峯), 김창기(金昌基). 충청남도 논산 출신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조선노동대회, 서울청년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민족해방운동과 노동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 3월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중퇴하고 1919년 말 국내로 들어왔다.

1920년 1월 대구 광문사(廣文社) 사장과 대구 민의소(民議所) 소장을 지낸 김광제를 설득, 1920년 2월 16일 조선노동대회를 발기하고 5월 2일 창립대회를 열어 간사로 활동하였다. 김영만은 노동대회 회장인 김광제와 함께 잡지 『노동』을 간행하고 각지에 지부를 설치, 수차례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20년 7월 조선민단이 주최한 강연회에서 조선독립사상을 선전하고 치안을 방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1922년 10월 서울청년회 내부의 공산주의 그룹이 조직되었을 때 충청남도 오르그로 임명되었다.

1923년 2월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이 전위조직으로 고려공산동맹을 창립할 때 김사국·이영·임봉순·장채극 등 서울파 핵심 멤버와 함께 17인의 중앙위원 가운데 1인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3월 ‘서울파’의 핵심 멤버로서 전조선청년당대회를 준비하고, 같은 해 4월 청년당사(靑年黨社) 창립을 결의하여 김유인·정학원·임종만·이영 등과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1923년 7월 양말직공 파업보고강연회에서 「우리의 무기」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같은 해 8월 낙양관(洛陽館)에서 김약수가 북성회 순회강연단을 이끌고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김영만 등 서울파와 알력이 벌어졌다. 이 ‘낙양관사건’으로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11월 징역 1년을 선고받고 1924년 7월 출옥하였다. 그 해 10월 고려공산동맹이 집행부서를 재정비할 때 민족부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11월 서울파의 무력조직인 적박단(赤雹團) 결성에 참여, 12월 북풍회 사무소를 습격하였다. 같은 달 이영·정백·이정윤·최창익·한신교 등 50여 명과 발기하여 사회주의자동맹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들어 조선공산당 창당을 둘러싼 화요파와 서울파의 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할 즈음부터 서울파의 핵심 세력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1월 서울파가 주도한 전조선노동교육자대회 개최 계획에 참여하여 이낙영·임봉순 등 15인과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5년 3월 조선노동대회가 경성노동회로 개편될 때 김사민·이항발 등과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달 서울청년회 주최로 개최된 ‘파리코뮌 기념강연회’에서 「코뮌의 사(死)를 추억함」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또한 재경조선해방운동자단체 연합간친회가 서울파 산하의 11개 단체 대표의 참여로 개최되었을 때 청년당사 대표로 참여, 의장을 맡고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반대단체 전국연합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

1925년 10월 고려공산동맹의 결정에 따라 최창익·이운혁 등과 코민테른에 파견되었다. 12월 무렵 블라디보스토크 코민테른집행위원회 동양부에 도착, 통일적인 조선공산당 결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6년 1월에는 모스크바에 도착, 최창익과 함께 2월에 「서울청년회 내부에 현존하는 공산주의조직 ‘고려공산동맹’ 전권대표」라는 직함을 가지고 「코민테른집행위원회에게」라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또한 북풍회의 신철, 조선노동당의 이남두 등과 통일적 조선공산당 창립을 위한 제안서인 「코민테른집행위원회에게」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1927년 12월 20일∼22일 서울파의 조선공산당 3차 당대회에서 코민테른에 파견되어, 1928년 3월 「코민테른집행위원회 정치서기국에게」라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여기에는 안광천 등 ML파 조선공산당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들어 있었다. 1928년 「12월테제」로 조선공산당이 해체되자 윤자영, 김철수 등과 1929년 3월 하순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으로 가 조선공산당 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여기에서 선전부 간부로 선정되어 기관지 『볼셰비키』를 발행하는 등 조선혁명을 위해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신간회연구』(이균영, 역사비평사, 1993)
『한국공산주의운동사』(김준엽·김창순, 청계연구소, 1986)
「1920년대 국내사회주의운동연구-서울파를 중심으로-」(전명혁,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국외용의조선인명부(國外容疑朝鮮人名簿)』(조선총독부경무국, 1934.7)
『現代史資料』 29(姜德相·梶村秀樹 編, みすず書房, 1972)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전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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