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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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서기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정치인.
이칭
이칭
이우한(李愚漢)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6년(고종 43)
사망 연도
1956년
출생지
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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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이강국은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서기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정치인이다. 1906년 경기도 양주 출생으로 1927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진학해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을 배웠다. 1932년에 독일 베를린 법대에 유학하면서 공산주의 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독일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해방 후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서기장과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고,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활동하였다. 1946년 9월 미군정의 정책을 비판한 후 박헌영과 함께 월북하였다. 1953년 3월 남로당계 숙청 때 체포되어 3년 후 사형되었다.

목차
정의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서기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정치인.
생애 및 활동 사항

이강국은 경기도 양주(楊州) 출신으로 1906년 양반 이기택(李起澤)의 2남으로 출생하였다.

이후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자 그곳에서 수학하였고, 1925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 해 경성제국대학 예과 제2기에 입학하였으며, 1926년 유진오 등이 조직한 경제연구회(經濟硏究會)에 가입하였다. 이때 맑스의 『자본론』, 힐퍼딩의 『금융자본론』, 플레하노프의 『유물사관의 근본문제』, 부하린의 『유물사관』등을 학습하였다.

1927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진학한 그는 이무렵 재정학 교수로 부임한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에게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을 배웠다. 1930년 3월 법문학부를 졸업하면서 미야케경제학교실의 조수(助手)로 채용되었다. 이 당시 이강국은 정치공법연구실, 최용달(崔容達)은 사법연구실, 박문규(朴文圭)는 경제연구실에서 일하였다.

1931년 9월 10일 이강국은 미야케 교수와 최용달 · 박문규 등과 조선사회사정연구소(朝鮮社會事情硏究所)를 창립하여 정치, 경제, 법률, 노동운동, 농민운동, 종교, 교육, 문화의 각부문에 걸쳐 실증적 · 통계적 조사를 하며 아울러 내외의 이론을 검토 · 연구하여 그 성과를 대중의 앞에 제공하려 하였다.

1931~1932년 초 이강국은 이우한(李愚漢)이란 필명으로 『비판(批判)』등에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자인 막스 아들러(Max Adler)에 대한 비판의 글과 소련의 계획경제에 대한 찬양의 글, 독일 자본주의 경제공황의 상황과 파시즘의 실상 등의 글을 기고하였다.

그는 1932년에 경성제대 교수 미야케 시카노스케의 추천과 처남 조준호(趙俊鎬)의 재정 지원으로 독일로 유학갔다. 1932년 2월 그는 베를린 법과대학에서 헌법과 행정법을 전공하면서 프롤레타리아 과학동맹, 혁명적아세아인협회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혁명적아세아인협회는 1932년 1월 동경제대 사회위생학 교수 구니자키 데이도[國崎定洞]가 재독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 인도인, 인도네시아인 등을 규합하여 설립한 단체였다. 이 단체는 독일에서 아시아인의 연대와 독일인과 아시아 피억압민족의 단결과 공감을 획득하는 것을 표명하였다.

아울러 모든 혁명적 아시아인, 모든 혁명적 지향을 갖는 독일의 반제국주의자에게 협회와 그 기관지를 지원하고 원조하여 제국주의의 타도와 자유로운 세계를 쟁취하기 위해 강력한 일보전진을 할 것을 호소하였다.

1932년 10월 이강국은 독일공산당에 가입하였고, 구니사키 데이도가 조직한 혁명적아시아인협회에 참가하여 코민테른의 각종 테제를 국내에 전달하는 활동 등을 하였다. 그는 일본인 그룹 책임자로서 독일공산당의 대외연락 및 문서교환을 도와주고 독일에서 발간되는 각종 자료를 입수, 번역하여 국내의 경성제대그룹의 최용달 등에게 우송해 국제정세 흐름을 알렸다.

한편 코민테른의 결의와 동향을 파악해 그 이론을 조선에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그의 스승인 미야케와 정태식 등이 ‘미야케교수 적화공작사건’으로 검거되자 1935년 11월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경찰에 체포되어 예심에 회부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강국은 1935년 7월 코민테른 7차대회의 인민전선론을 수용하여 1936년 최용달 · 이주하(李舟河) 등과 원산적색노조에 관계하였다. 1938년 일본경찰에 다시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5년간의 집행유예를 받고 1943년 석방되었다. 1944년 여운형(呂運亨)의 건국동맹에도 관여하였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자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서기장과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공화국으로 해소되었을 때 55명의 인민위원 중 1인으로 선출되었고, 박헌영(朴憲永)과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활동하였다.

1946년 2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상임위원 및 사무국장으로도 활동하였는데, 동년 9월 미군정의 정책을 비판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여 박헌영과 함께 체포령이 내리자 월북하였다.

1947년 1월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 1948년 상업성법규국장, 1950년 12월 인민군 제69호 병원장, 1952년 11월 무역성 조선 일반제품 수입상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3년 3월 남로당계 숙청 때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으로 체포되어 1956년 사형되었다. 저서로는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1946) 등이 있다.

참고문헌

『이강국연구』(심지연, 백산서당, 2006)
「1920년대 이강국과 그의 인민전선론 인식」(전명혁, 『마르크스주의 연구』5-3, 2008)
「1930년대초 코민테른과 미야케(三宅鹿之助)의 정세인식」(전명혁, 『역사연구』16, 2006)
「咸鏡南道元山府を中心とせる朝鮮民族解放統一戰線結成幷支那事變後方攪亂事件の槪要」(朝鮮總督府 高等法院檢事局思想部,『思想彙報』21, 1939)
「李康國 意見書」(京畿道警察部, 1935.12.13)
집필자
전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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