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규 ()

정치
인물
일제강점기 성대반제운동사건 과 관련된 학자. 정치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6년(고종 43)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경상북도 경산
관련 사건
성대반제운동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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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성대반제운동사건 과 관련된 학자. 정치인.
개설

경상북도 경산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1925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거쳐 동대학 법문학부에 진학하였다.

대학입학 동기인 이강국(李康國)·최용달(崔容達)과 함께 1927년 교내 서클인 ‘경제연구회’에 가입하고 조선농업경제학 연구에 주력하였다.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조교로 남아 연구생활을 계속하던 중 1931년 성대반제운동사건(城大反帝運動事件)으로 일제경찰에 피검되었다.

당시 경성제국대학출신이 주축이 되어 발간한 ≪신흥 新興≫에 <조선농촌기구의 통계적 해설>이라는 논문, 그리고 1933년 발간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회 논집인 ≪조선사회경제사연구≫에 <농촌사회분화의 기점으로서의 토지조사사업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여 농업경제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토지조사사업을 경제사적으로 분석하였다. 즉, 조선 말기에는 이미 봉건사회 태세에서 토지의 봉건적 점유를 근대적 소유로 전화(轉化:질적으로 바뀌어 달리 되는 것)의 싹이 보였지만, 일본제국주의의 요구에 의해 치뤄진 토지조사사업(1910∼1918)에 의하여 조선에 근대적 토지사유제도가 확립되었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한편, 그는 일제하의 비밀결사인 여운형(呂運亨) 지도하의 건국동맹(建國同盟)의 맹원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8·15광복 직후 조선학술원 상임위원에 취임한 일도 있었으나, 정치가로 변신,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기획부장, 조선인민공화국의 중앙인민위원 및 재정부장대리를 역임하였다.

1946년 2월에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선전부장 겸 기획부차장, 상임위원·토지농업문제연구위원·식량대책연구위원 등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1946년 10월≪조선토지문제논고≫를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어로 발표한 앞의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논문을 국역한 것이다.

그리고 1936년에 집필하였으나, 검열관계로 발표되지 못하였던 <조선농업생산관계고>, 1945년 11월 제1차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회의에서의 <토지농업문제에 관한 보고>, 1946년 12월의 <농민운동의 행동강령>, 같은 해 3월의 <토지문제의 평민적 해결에 대하여>, 같은 해 4월의 <반민주진영의 토지정책>, 같은 해 5월의 <민주주의와 토지개혁> 등의 보고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1948년 8월 월북 직전까지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을 역임하였고, 월북 후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과 농림상으로 발탁되었으며, 6·25전쟁 후 남로당계가 숙청당하면서 1954년 농림성부상으로 강직되었다.

이후, 1956년 4월 국가검열상, 1959년 지방행정상, 1962년 내무상, 1967년 최고인민회의 제4기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서기장을 역임하였고, 1970년 노동당 중앙위원에 피선되었다.

참고문헌

『조선토지문제론고』(박문규, 신한인쇄공사, 1946)
『신조선』(1947.4.)
『남로당연구』(김남식, 돌베개,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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