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양 출생. 1925년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에 제2기로 입학하여 예과에서 본과로 진학할 때에 법학부를 지원하였다. 1927년 박문규(朴文圭)·이강국(李康國) 등과 함께 교내서클인 경제연구회에 가입하였다.
이곳에서, 공산주의 이론 및 식민지시대 조선실정에 대하여 공부하였고, 1929년 원산부두노동자 파업 때 진상을 조사, 보고하기 위한 경제연구회 대표로 파견되었다. 졸업한 뒤에는 경성제국대학에 조수로 남아 학업을 계속하였다.
한편으로, 1930년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발간한 『신흥(新興)』의 발간에 간여하였다. 그 뒤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주로 법철학을 공부하였다. 박문규·이강국 등과 같이 광복 직전 여운형(呂運亨)의 건국동맹에 참여하였다.
광복이 되자 건국동맹을 주축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8월 22일 유석현(劉錫鉉)·장권(張權)·정의식(鄭宜植) 등과 함께 치안부 책임을 맡았다. 같은해 9월 백남운(白南雲)을 위원장으로 하여 조직된 조선학술원 상임위원을 역임하였다. 이후 이 활동 중에 월북하여 11월 북조선인민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1946년 2월 사법국장을 역임하고 조선노동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대의원을 역임하였으나 그 뒤 소식이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