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일명 이주화(李舟花)로도 불렸다. 화전민 마을에서 태어나 1909년 아버지가 의병활동을 하였다고 의심을 받아 가족 모두 원산으로 이주했다. 1914년 원산 광성학교(光成學校)에 입학하고, 1917년 보광학교(保光學校)에 입학 후,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교사의 유인물 제작을 도왔다가 탄로나자 형이 있던 갑산으로 피신했다. 그 후 원산에서 객주집 심부름꾼, 일본인 상점 점원, 우편국 배달부 등을 전전했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학년 때인 1923년 동맹휴학을 주도한 일로 퇴학당하였다. 1924년경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전문부 사회과에서 수학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사상에 심취하였고, 지바〔千葉〕에서 공산청년동맹에 참여했다. 같은 해 학비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자퇴한 뒤 귀국했다.
귀국 후 원산부두에서 화물 운반 날품팔이로 일하면서 원산노동연합회 재건에 힘썼고, 1929년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에 가입했다. 1931년 정달헌(鄭達憲) 등과 평양노동연맹 좌익위원회를 조직하고, 태평양노동조합 함경남도 책임위원을 맡았다가 소위 ‘제1차 태로 사건(태평양노동조합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고 1936년까지 복역했다.
출옥한 뒤 원산으로 돌아와 적색노동조합운동에 착수했다. 1937년 최용달(崔容達) 등과 원산공산주의자그룹을 결성했으나 조직이 노출되어 흥남·원산·평양·진남포 등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중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원산에서 조선공산당 함경남도지구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결성하고, 9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2월 당의 요청에 따라 월남해 1946년 11월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 1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다.
1948년 8월 이후 김삼룡과 함께 남로당을 지도했고,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3월 안영달(安永達)의 밀고로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 뒤 북측에 억류되어 있던 조만식(曺晩植)과의 교환 제의가 오가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