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엔당은 김약수(金若水) 등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였다. 1923년 1월 15일 도쿄에서 김약수, 김종범(金鍾範), 송봉우(宋奉瑀), 변희용(卞熙鎔), 김장현(金章鉉), 이여성(李如星) 등 60여 명이 북성회(北星會)를 조직하였다. 북성회는 일본에서 『척후대』, 『전진』, 『해방운동』 등 기관지를 발행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후 북성회 멤버들은 국내에 들어와 1924년 4월 17일 까엔당(К.Н.Дан)이라는 비합법 전위조직을 창립하여 활발한 대중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까엔당은 조선민중당 또는 조선인민당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건설사(建設社), 염군사(焰群社)를 조직하고, 1924년 11월 25일 김약수, 김종범, 마명(馬鳴), 정운해(鄭雲海), 남정철(南廷哲), 서정희(徐廷禧), 박창한(朴昌漢), 박세희(朴世熙), 신용기(辛容箕)[신철], 송봉우, 이호(李浩) 외 13명이 주동이 되어 북성회의 국내 본부로 북풍회(北風會)를 결성하였다. 이에 까엔당을 북풍파 그룹이라고도 부른다.
1923년 8월 무렵 북성회 멤버들은 국내에 들어와 전국을 순회하면서 선전 사업과 조직화 사업을 벌여나갔다. 1924년 1월부터 경남노농운동자간친회, 남선노농동맹, 전라도노농연맹 등을 조직하고, 4월에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을 결성하는데 하나의 축을 형성하여 일제 식민지하 노동자·농민운동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12월에는 경성청년회(京城靑年會)를 조직하여 청년 대중운동 사업도 벌였다.
까엔당은 창립 당시 “조선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그의 동조자를 추방하고 분쇄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또한 적극적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운동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국가로서 조선을 해방하고 자주적인 민주주의 공화국을 창건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유일한 민족혁명전선에 모든 혁명 세력을 집합시키고 그것(광범한 민족당을 조직하는 것)을 구체화한다. 또한 그것을 자신의 지도와 전위의 임무로 삼는다. 까엔당은 조선의 근로대중을 지도하고 조선 해방을 위한 투쟁에 주요한 전투부대로 된다. 동시에 그들을 교육하고 조직하고 지도하여 그들이 당면 프롤레타리아혁명에 유일한 수장이 되도록 고무한다.” 등의 강령을 가지고 있었다.
1920년대 민족운동, 사회운동사에서 서울파, 화요파 등과 더불어 조선 독립과 해방을 위해 활발한 투쟁을 했던 사회주의운동 세력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