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채극(張彩極)은 1897년 8월 26일 함경북도 부령에서 태어났으며, 이명은 왕자명(王子明)이다.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와 일본에서 공부하였다. 1972년 7월 11일에 사망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보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 서울의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고국민대회(告國民大會) 사건’으로 김사국(金思國)과 함께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3월 4일 서울 배재고교 기숙사에서 학생 대표인 한위건(韓偉健)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인쇄하여 각 학교 배포 담당자에게 전달하였다. 4월 22일 밤에 ‘선포문’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취지서’ 약 6,000여 매와 간판 등의 선전물을 이철 등에게 전달하였으며, 다음 날인 23일에는 집합 장소인 남대문 앞에서 시위 군중에게 선전물을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검거되었다.
1922년 10월 서울에서 김사국‧ 이영(李英) 등과 공산주의그룹을 결성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말에는 이 그룹의 합법 청년 단체인 서울청년회에 가입하였다. 장채극은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1923년 2월 서울파의 고려공산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3년 8월 「출판법」 위반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었다.
19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의 창립대회에 참가해 전형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달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서는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9월에는 함경북도에서 고려공산청년동맹 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0월에는 김기도(金基道)‧허염(許廉)‧김창률(金昌律) 등과 함경북도 청진(淸津)에서 열린 북선연락지방물산공진회(北鮮聯絡地方物産共進會) 대회장을 폭파하여 민심을 교란하고 선전 선동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물거품이 되었다. 이 일로 장채극 등은 검거되었지만, 불기소처분으로 끝났다. 11월에는 전조선노동교육자대회 준비위원, 12월에는 사회주의자동맹의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4월에는 서울파 조선사회운동자동맹의 발기대회에서 선전부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가을 청진노동회 상무, 신간회 청진지회 집행위원, 『동아일보』 청진지국장이 되었다. 1926년 2월에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 검거되었으나, 이듬해 무죄 방면되었다.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