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위건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선전부장, 중국공산당 하북성위원회 선전부장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이칭
이칭
이철악, 이철부, 이광우, 이영식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6년(고종 33)
사망 연도
1937년
출생지
함경남도 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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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선전부장, 중국공산당 하북성위원회 선전부장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가명은 이철악(李鐵岳)·이철부(李鐵夫)·이광우(李光宇)·이영식(李永植) 등 여러 가지를 사용했다. 함경남도 홍원 출신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4년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했고,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1월 반일시위운동 학생 지도부에서 경성의전 대표로 참여해, 제1선의 학생대표가 체포될 때를 대비한 제2선의 대표가 되었다.

3월 1일 당일 파고다공원에서 학생대표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4월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해 내무위원과 함경도 의원이 되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건을 비판했으며, 10월 이후 『신대한』의 발간에 관여하면서 상해 임정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1920년 귀국한 즉시 일본으로 유학해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했다. 일본유학시 조선유학생학우회 총무, 조선기독교청년회 이사를 지냈으며, 독립군 자금 모집 사건에 관련되어 일시 검거된 적도 있다. 1921년 11월 워싱턴회의 개최에 즈음해 조선유학생회 주최로 만세시위운동을 시도했다.

1923년 여름 조선유학생학우회 강연대의 일원으로 귀국해 순회 강연을 했으며, 9월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서울에서 일본유학생대회를 개최하고, 동경지방 이재 조선인구제회 발기인 및 위원으로 활동했다. 10월에 동경으로 가서 조선인 학살사건을 조사했고, 피살된 조선인 동포 추도회에 참가했다.

1924년 1월 『동아일보』에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이 발표되자 재동경 조선인대회를 개최해 동아일보사의 사죄 및 논설 취소를 요구했다. 1924년 가을 귀국했고, 10월 『시대일보』 이사가 되었다.

1925년 3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고 가을에 이덕요(李德耀)와 결혼했다. 9월 구미 및 일본 유학생 출신의 학자와 언론인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사정조사연구회에 참가해 총독부의 산미증식계획에 대해 조사 연구했다.

1926년 11월 정우회에 가입해 안광천과 함께 「정우회 선언」을 발표했다. 이와 병행해 제3차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12월 선전부원이 되었다. 1927년 초 신간회 발기에 참여했으며, 2월의 창립총회에서 간사로 활동했다. 1927년 9월에는 제3차 조선공산당 선전부장이 되었다.

1928년 초까지 동아일보사 기자로 재직하면서 신간회 내에서 공산당의 세력 확대 작업을 추진하였다. 1928년 2월 일제의 검거로 제3차 조공이 궤멸되자, 제3차 전국대회 개최를 주도했고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7월 제4차 조공 12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참석한 후, 가을에 일제의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1929년 코민테른 12월테제의 방침에 따라 당재건운동을 전개하면서, 잡지 『계급투쟁』을 발간해 당재건운동의 이론과 방침을 제시했다.

『계급투쟁』에 발표한 「조선 혁명의 특질과 노동계급 전위의 당면임무」(1929.5), 「조선에 있어서 볼세비키당의 결성과정과 사회투기주의의 박멸」·「대중적 전투적 협동전선의 결성과 신간회 및 독립촉성회의 임무」(1929.12), 「조선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운동의 방향전환기의 이론적 실천적 과오와 그 비판」(1930.1) 등은 당재건운동기 서울상해파와 구화요파의 운동론을 비판하면서 엠엘파의 운동론을 체계적으로 밝히고 있는 문건이다.

1930년 1월 상해에서 민족주의자와 공동으로 광주학생운동 기념대회를 개최했다. 1930년 3월 이후 고경흠·김소익 등이 일본과 국내에서 전개한 당재건운동을 지도했다. 1930년경 북경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했고, 이후 이철부라는 중국식 이름을 사용했다.

1931년 가을부터 북평반제동맹 내 당·공청 프랙션 서기로 활동했다. 1933년 중국 국민당 정부 경찰에 체포되었다. 석방된 후 중국공산당 하북성위원회 선전부장이 되었다. 1933년 말 중국공산당 당원 장수암(張秀岩)과 결혼했다.

이 무렵 중공당 지도부의 좌경노선을 비판하기 위한 제7회 당대회 개최 의견서를 하북성위원회에 제출해, ‘우경취소주의’로 비판받았다. 이로 인해 중국공산당과의 관계가 일시 단절되었다. 이후 중화민족무장자위회와 천진(天津)각계구국회 등 항일단체 조직에 참여했다.

1935년 12월 천진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반대하는 항일집회를 개최하고 항일시위운동을 지도했다. 1936년 봄 좌경노선이 청산되고 모택동(毛澤東) 노선이 확립되면서 유소기(劉少奇)가 북방국 서기로 천진으로 부임하자, 하북성위원회 서기 겸 천진시 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37년 5월 연안에서 개최된 소비에트구역 당대표 대회에 국민당지구 대표로서 참석했다. 7월 대회 기간 중 건강상 문제로 섬감녕(陝甘寧) 서북국으로 배치되었다가, 대회가 끝난 후 연안의 요양소에서 사망했다.

저서로는 『朝鮮前衛黨 當面の問題』(左翼書房, 1930)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40년 ‘철부노선’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중국공산당의 정식 결정이 내려졌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한국공산주의운동사』2(김준엽·김창순, 청계연구소, 1986)
『불굴의 투사: 리철부동지를 추억하여』(김형직 편역, 료령민족출판사, 1982)
『朝鮮問題資料叢書』第七卷(朴慶植 編, 三一書房, 1982)
「韓偉健」(水野直樹, 『朝鮮民族運動史硏究』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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