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성룡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배성룡 전후면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배성룡 전후면
근대사
인물
해방 이후 통일독립촉진회 상무집행위원, 한국일보 논설위원 등을 역임한 언론인. 사회주의운동가.
이칭
이칭
배수성(裵秀星), 성산학인(星山學人), 성산생(星山生), 성산인(星山人), 별뫼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6년(고종 33)
사망 연도
1964년
본관
성주(星州)
출생지
경상북도 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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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이후 통일독립촉진회 상무집행위원, 한국일보 논설위원 등을 역임한 언론인.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본관은 성주(星州). 경상북도 성주 출신. 배수성(裵秀星)·성산학인(星山學人)·성산생(星山生)·성산인(星山人)·별뫼 등의 필명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배운홍(裵運鴻)이고, 어머니는 유윤이(柳允伊)이다.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2년 성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같은 해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기수로 들어갔다. 1914년 토지조사국 기수직을 사임하고, 1915년 성주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들어가 4년 동안 근무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교사직을 사임하고 일본 동경으로 유학, 니혼[日本]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하여 1923년 졸업하였다. 1923년 봄 귀국한 후 조선일보사 기자가 되고, 그 해 7월 『조선일보(朝鮮日報)』에 「사회변혁과 사상적 고찰」(28회)을 발표하였다. 1924년 가을 조선일보사를 퇴사하고 화요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투신하였다.

1925년 8월 『동아일보(東亞日報)』 경제논문 현상모집에 공모하여 당선되고, 같은 해 베벨(August Bebel, 1840∼1913)의 『여성과 사회주의』를 『부인해방과 현실생활』로 번역·출간하였다. 1926년 3월 박일병의 권유에 따라 조선공산당에 입당, 경성부 제1야체이카에 소속된 뒤 정우회 프랙션으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화요파의 대표적 이론가로 강연 또는 집필 활동을 통해 코민테른의 반제연합전선전술을 소개하고 민족협동전선의 결성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특히 사회운동 통일 방안에 대해서는, 서울파와는 달리 식민지적 특수성을 강조하여 사상단체 중심의 통일론을 주장하였다. 같은 해 7월 7일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1928년 9월 만기출옥, 연말에 조선일보사 경제부장이 되었다. 1931년 조선일보사를 퇴사하고 11월 중앙일보사로 자리를 옮겨 경제부장·정치부장이 되었다. 중앙일보사 재직시 친일 사장 노정일(盧正一) 반대운동을 벌였다.

1933년 2월부터 1936년까지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의 논설반 기자·편집차장·정치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대에는 경제 평론가로 활동하였다. 1934년 의열단의 국내 연락책으로 활동한 적도 있으나, 1936년 가을 이후 절필, 성북동 자택에서 은둔하였다.

1945년 9월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 각당통일기성회 등의 조직에 참여해 정당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초 신탁통치 문제로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하자 이를 조정하기 위해 통일정권촉성회를 조직하였다. 7월에는 좌우합작촉성회 조직에 참여, 좌우합작운동을 후원하였다. 10월 이후에는 구화요계 인사들과 제3당 결성을 추진, 1947년 2월 민주주의독립전선을 조직하였다.

그 해 10월 김규식(金奎植) 중심으로 중도세력연합체로 조직된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여 정강정책 기초위원·전형위원·중앙집행위원·중앙상무집행위원·선전부차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4월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문화인 108인 선언에 참여하고, 곧이어 김규식의 제2차 특사로 평양에 가서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남북협상이 끝난 후 통일독립촉진회 조직에 참여해 상무집행위원, 조직국장 등을 지내면서 남북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6·25전쟁 후 남한에 머물면서 대학 강사, 한국일보 논설위원 등을 지내면서 진보적 경제평론가로 활동하다 1964년 12월 8년여의 투병생활 끝에 사망하였다.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좌익과 우익의 이념적 대립을 극복하고 민족의 역량을 결집하여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한 이론 개발과 실천 활동으로 일관하였다.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마르크스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견지했고, 계급 문제를 민족 문제에 포괄하여 인식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민족주의의 우익과 사회주의의 좌익이 협동전선을 결성, 민족해방과 민족통일을 성취하고자 하였다.

해방 이후 신국가 건설이념으로 ‘신형민주주의’를 제시하였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효율성과 사회주의의 평등성을 조화하는 성격을 지닌 것으로, 정치적으로는 의회민주주의를, 사회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을 채택한 사회민주주의적 지향성을 지닌 이념이었다.

저술활동

저서로는 『조선경제론(朝鮮經濟論)』(문화사, 1926), 『귀농운동(歸農運動)의 의의(意義)』(1931), 『식민지문제(植民地問題)의 기본지식(基本知識)』(공생사서점, 1931), 『조선경제(朝鮮經濟)의 현재(現在)와 장래(將來)』(한성도서주식회사, 1933), 『자주조선(自主朝鮮)의 지향(指向)』(광문사, 1949)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2005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한국근현대 사회사상사연구』-배성룡의 진보적 민족주의론-(김기승, 신서원, 1994)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2(김준엽·김창순 편, 고려대학교출판부,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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