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李英)·정백(鄭栢)·한신교(韓愼敎)·최창익(崔昌益) 등 50여 명의 발기로 1924년 12월 6일 결성되었다. 창립총회에서 채택된 취지를 보면, “근래 사회운동 무산계급 해방운동이 점고됨에 따라 이를 더욱 견실하게, 더욱 정당하게 지도하여 새로운 기운을 조성하고, 더욱 거대한 덩어리로 만들 필요가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일본경찰의 간섭으로 끝내 공표되지는 못하였으나, 강령은 “농민단체와 노동단체를 결합하고, 단체위력에 의한 지주 및 자본가에 대항하여 노동계급사회의 실현을 기한다.”는 내용의 급진주의였다.
집행위원으로는 이정윤(李廷允)·한신교·이영·김사국(金思國) 등 21명이 선출되었으나, 이들은 거의가 서울청년회의 간부였기 때문에 이 동맹은 서울청년회의 울타리 같은 별동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동경(東京)에 있던 북성회(北星會)가 같은 해 11월 국내 사상단체로서 북풍회(北風會)를 조직하고, 한국의 대표적 사회주의통일전선임을 내세워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고자 했으므로, 서울청년회에서는 사상단체로서의 이 동맹을 조직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표를 파견하여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북풍회와 마찬가지로 승인을 얻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