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만주사변 이후 중국을 비난하고, 국제연맹 탈퇴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시국 대회와 결의 대회 등을 개최하였다. 또한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시국 간담회를 개최하여 중국을 지원하는 영국을 비판하였다. 그러다가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에, 1941년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에 편입됨으로써 관변 선전 단체가 되었다.
갑자구락부는 각종 정치 현안에 관해 조사하고 이를 청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설립과 동시에 자신들의 의견을 압축한 「전언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조선총독부의 세출 총경비를 1,500만 원 내지 2,000만 원을 절약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치론’에 관해서는 독립의 전제가 된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중점을 둔 참정권 청원 운동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이들이 주장한 참정권은 유권자의 범위를 극히 제한한 것인데,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경성, 부산, 대구, 평양에서만 선거를 실시하자는 내용이었다. 일본과 동일한 정치적 상황을 조성하자는 ‘내지연장주의(內地延長主義)’에 입각해서 조선 내 일본인과 극소수의 조선인을 일본 국회에 참여하게 하자는 정치적 입장을 표방한 것이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조선총독부의 정책 변화와 조선인들의 외면으로 회원 수가 급격히 감소하는 등 쇠퇴하여 유명무실한 존재로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