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복구강토(復舊疆土)‘라는 의미의 고어(古語) '다물'을 따서 ’다물단‘이라 하였다가, 신흥학우단으로 이름을 고쳤다. 단의 이념은 “혁명 대열에 참여하여 대의를 생명으로 삼아 조국 광복을 위해 모교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한다.”였다.
정단원(正團員)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전신]의 교직원과 졸업생이, 준단원(準團員)으로 재학생이 입단하였다. 단장 아래로 편집부, 총무부, 운동부, 조사부, 토론부, 재정부 등 6부를 두었다. 초대 단장은 김석(金石), 편집부장 강일수(姜一秀), 총무부장 이근호(李根澔) 등이었다. 토론부는 매주 토요일 각종 토론회를 개최하여 항일 투쟁 의식을 고취하였다.
1913년 6월 기관지로 『신흥교우보(新興校友報)』를 창간하였다. 주필 겸 편집부장에는 신흥강습소 1회 졸업생인 강일수가 맡았고, 졸업생인 이동화, 장정근 등이 기자로 활동하였다. 『신흥교우보』는 군사, 시사, 문예, 농사 등 다양한 기사를 게재하고 단원들에게 혁명이념의 선전과 민족의식의 고취에 힘썼다. 이 잡지는 만주뿐만 아니라 연해주, 미주까지 배송되었다.
주요 사업은 군사 · 학술을 연구해 실력을 배양하고, 각종 간행물을 통한 독립사상 고취였다. 또한, 농촌에 소학교를 설립하여 아동 교육을 담당하였고, 노동강습소를 개설해 농촌 청년들에게 초보적 군사훈련과 애국계몽운동을 실시하였다. 1914년 자치단체인 부민단(扶民團)과 힘을 합쳐 1914년 통화현에서 백서농장(白西農莊)을 건설하였다.
이 단체는 신흥강습소 졸업생의 친목과 단결을 조직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적으로 서간도(西間島) 한인 사회의 발전과 항일 독립운동을 추진하고자 조직되었다. 신흥강습소 졸업생 대부분은 독립군에 편입되었다. 1920년 8월 일제의 탄압으로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자 새로운 졸업생이 충원되지 않아 자연 해체되었다.